유니야의 조선시대 '사내기생'

조선 시대 ‘사내기생’

  • 2025. 5. 30.

    by. 유니야15

    목차

      1. “기생” 하면 왜 여성이 먼저 떠오를까?

      "기생"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스레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성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녀는 부채를 들고 우아한 손짓으로 춤을 추며,
      때로는 시를 읊고, 때로는 거문고를 타며 양반들과 술잔을 나눈다.

      이는 단지 상상이나 오해가 아니다.
      조선 후기부터 이어진 문화적 기억 속에서 기생은 여성의 직업으로 굳어졌다.
      이런 인식은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진 사회적 이미지와 문화적 재현의 결과물이다.

      문화 콘텐츠의 영향

      현대인의 머릿속에 각인된 기생의 이미지는
      많은 경우 영화나 드라마, 소설, 교과서에서 유입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드라마 《황진이》나 영화 《기방도령》, 《춘향전》 속 월매 같은 인물들이
      ‘여성 기생’이라는 이미지를 굳건하게 만든다.

      이러한 콘텐츠들은 기생을 여성 중심으로 재현하면서,
      기생 = 여성이라는 공식을 더욱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만든다.

      교과서와 기록의 한계

      또한 우리가 접해온 역사 교육 역시
      기생을 여성으로만 규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중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황진이나 논개처럼
      국난극복 또는 문화활동에 기여한 여성 기생만이 주로 등장한다.

      이는 여성 기생만이 중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남성 기생에 대한 기록과 언급이 의도적으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의 남성 기생은 특정한 목적 아래 훈련되고 활용된 존재였지만,
      유교 중심 사회에서 ‘여성처럼 행동하는 남성’은 불편한 존재였고,
      그 불편함은 곧 역사적 침묵으로 이어졌다.

      왜 ‘여성 기생’만 기억되었을까?

      기생이 본래 ‘여성을 위한 직업’이었기 때문일까?
      사실 기생은 애초에 성별로 제한된 직업이 아니었다.

      고려와 조선 초기에는
      남성과 여성 모두 공연, 접대, 악기 연주, 시 낭송, 의전 예술에 참여했고,
      그중 남성은 ‘사내기생’ 혹은 ‘악공’, ‘정재수’ 등의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여성 기생이 민간 접대 문화의 중심이 되면서
      남성 기생은 점점 궁중 의례 중심으로 축소되었고,
      후기로 갈수록 기록에서도 빠르게 사라져갔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한쪽 성별의 모습만을 반복적으로 보고 들으며
      기생이 곧 여성이라는 역사적 편견에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기억의 구조: 익숙함이 진실은 아니다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기생의 모습은
      실제보다 더 정제되고, 더 이상화된 여성상이다.
      이는 곧 문화적 편집의 결과이며,
      특정한 시선이 만들어낸 젠더 프레임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틀 밖에 존재했으나 잊힌 존재들,
      바로 조선의 사내기생을 다시 호출하는 것이다.

      이들은 단순히 ‘남자 기생’이 아니라,
      조선 사회가 만든 젠더 구분의 경계를 드러내는 상징적 존재다.

      ‘기생’ 하면 여자? 조선에는 남자 기생도 있었다

      2. 조선에도 남자 기생이 있었다고?

      “조선 시대에 남자 기생이 있었다?”
      이 말은 처음 들으면 낯설고도 어색하게 들릴 수 있다.
      우리는 기생을 늘 ‘여성’으로 인식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조선 왕조의 중심인 궁궐 안에는
      실제로 남성 기생, 즉 사내기생이라 불리는 존재가 분명히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예능에 뛰어난 남자가 아니라,
      국가의 격식을 상징하고, 왕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던 공식적인 의전 인물이었다.

      궁중에서 여성은 제한되었다

      조선은 유교 이념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던 시대였다.
      남녀유별, 부부유별, 삼종지도 같은 윤리는
      여성의 외출을 엄격히 통제했고,
      특히 궁중에서는 여성의 활동 반경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왕실의 연회나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공식 행사에서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춤과 노래, 즉 여성성을 구현하는 예술적 퍼포먼스가 필요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은 들어올 수 없고,
      그 역할은 반드시 수행되어야 하던 상황.
      바로 그 지점에서 사내기생이라는 특수한 존재가 만들어졌다.

      사내기생의 탄생: 예술과 성별의 경계에서

      사내기생은 남성이지만,
      궁중 무용과 노래, 악기, 말투, 손짓, 표정까지
      모두 ‘여성처럼’ 연기해야 했다.

      그들의 존재는
      단순한 남자 예능인, 또는 무희가 아니었다.
      그들은 철저히 기획된 예술의 수행자였으며,
      성별 경계를 넘는 국가가 지정한 퍼포머였다.

      조선은 사내기생을 통해

      • 궁중의 격식을 유지하고,
      • 여성의 부재를 보완하며,
      • 권위와 미학의 이상을 동시에 구현했다.

      실록과 의궤에도 남아 있는 기록

      조선왕조실록이나 의궤(王室儀軌)를 살펴보면,
      사내기생의 존재는 여러 차례 등장한다.
      대표적인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정재(呈才): 궁중의 공식 무용을 뜻하며,
        이를 수행하는 사람들 가운데 남성들이 명시되어 있다.
      • 장악원 악공: 장악원은 왕실 음악을 담당하는 관청으로,
        여기서 양성된 남성 예인들이 실제 연회와 의례에서 활동했다.

      또한, 성종·중종 시대에는 왕이 직접 정재의 연습을 참관하고,
      그중 뛰어난 사내기생에게 상을 내렸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이는 그들이 단지 배경 역할이 아니라,
      조선 궁중문화의 주체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왜 우리는 이들을 몰랐을까?

      이처럼 사내기생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왜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지금까지 몰랐을까?

      그 이유는 명확하다.

      • 첫째, 이들은 불편한 존재였다.
        남성임에도 여성처럼 행동한다는 사실은
        유교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일이었다.
      • 둘째, 이들은 공식적인 기록에서는 지워졌다.
        이름보다는 역할로만, 혹은 통칭으로만 언급되며,
        구체적인 삶은 역사에서 소거되었다.

      결국 사내기생은
      필요했지만 받아들여지지 못한 존재,
      존재했지만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존재였다.

      이제 우리는
      “조선 시대에는 남자 기생이 없었다”는 편견에서 벗어나
      그들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그들의 존재가 당대 문화와 권력, 젠더 질서를 재구성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임을 이해해야 한다.

      3. 사내기생은 어떻게 등장했을까?

      사내기생, 즉 남자 기생이라는 존재는
      조선이라는 시대, 그리고 유교라는 질서 아래에서
      결코 우연히 생겨난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사회적 요구와 권력의 필요, 문화적 이상이 맞물린 결과물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이 만든 ‘의도된 경계인’**이었다.

      유교적 제약과 예술적 수요의 모순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삼은 나라였다.
      그 중심 사상 중 하나는 ‘남녀유별’, 즉 남녀는 각자의 역할과 공간을 지켜야 한다는 규범이었다.
      궁궐이라는 공간은 남성 중심의 폐쇄된 정치 공간이었고,
      왕실 의례 또한 대부분 남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 왕실은
      외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대형 연회를 여는 자리에서
      예술성과 우아함이 담긴 시각적 퍼포먼스를 요구했다.
      이때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담은 춤과 음악이 필수였다.

      문제는 그 역할을 여성에게 맡길 수 없다는 점.
      궁중 출입은 제한되어 있었고,
      정식 여성 기생을 궁 안으로 들이는 것은 정치적 부담이 컸다.

      결국 그 해법은,
      여성처럼 행동할 수 있는 남성을 ‘기획’하는 것이었다.

      사내기생의 성립: 여성을 연기하는 남성

      이렇게 해서 탄생한 사내기생은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었지만,
      외형과 말투, 제스처는 철저히 여성적이었다.

      그들은 단지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이 아니었다.
      왕 앞에서, 고위 관료 앞에서,
      조선이라는 국가의 품격과 위엄을
      몸짓과 표정으로 드러내는 예술적 상징체였다.

      이런 사내기생은 주로

      • 10세 전후의 소년 중에서 선발되었고,
      • 장악원에서 수년간 음악, 무용, 예법을 집중적으로 훈련받았으며,
      • 정재(呈才)라 불리는 궁중 무용을 통해 그 실력을 입증했다.

      단순한 예능인이 아닌 국가 시스템의 산물

      사내기생은 철저히 국가 주도의 시스템 아래 양성된 존재였다.
      이들을 배출한 기관은 장악원으로,
      왕실 의례와 음악을 관장하는 관청 조직이었다.

      이곳에서는 악공, 무용수, 가인 등 다양한 예술 직군이 훈련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여성적 미학’을 구현하는 역할로 선발된 이들이
      바로 사내기생이었다.

      이들은 의도적으로

      • 여성성을 연습하고,
      • 남성성을 숨기며,
      • 궁중에서 수행 가능한 ‘예술적 여성상’을 연기했다.

      이처럼 사내기생은
      조선이라는 체제가 필요에 따라 만들어낸,
      젠더의 경계를 넘나드는 공적 인물이었다.

      그들은 누구를 위해 존재했는가?

      사내기생은 스스로 선택한 삶이 아니라,
      사회적 틈새에서 국가가 만들어낸 예술 수행자였다.
      그들의 무대는
      단지 노래와 춤의 공간이 아니라,
      왕의 권위를 드러내고,
      외국 사신에게 조선의 품격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상징의 장이었다.

      사내기생은
      자신의 성별을 넘어선 역할을 부여받고,
      그 역할을 국가적 목적을 위해 수행한 존재였다.

      이제 우리는 단지
      “조선에도 남자 기생이 있었대!”라는 흥미 이상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그들은 조선이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성별, 예술, 권력의 경계를 넘나든
      불편한 진실이자 역사적 증거물이다.

      4. 장악원: 남자 기생을 훈련한 국가 시스템

      조선 시대의 예술은 결코 민간의 자율적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다.
      궁중에서 벌어지는 모든 공연과 음악, 의식 절차는
      국가가 기획하고 통제한 문화 시스템의 일부였다.
      그 중심에 있었던 기관이 바로 **장악원(掌樂院)**이다.

      장악원이란 무엇인가?

      장악원은 조선 시대 왕실 음악과 무용, 의례를 전담한 공식 관청이었다.
      경국대전과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차례 등장하며,
      그 위상과 역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왕실 의례와 연회의 예악(禮樂)을 총괄
      • 악공, 무용수, 기생 등의 예술 인력 양성
      • 악기 제작, 악보 관리, 정재 프로그램 편성
      • 외국 사신을 위한 공식 공연 운영

      이 기관은 단순한 음악학교가 아닌,
      궁중 문화와 국가 품격을 유지하는 전략적 부서였다.

      사내기생은 장악원에서 어떻게 길러졌나?

      사내기생의 훈련은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다.
      대개는 8세에서 12세 사이의 소년이 선발되었고,
      가난하거나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 선호되었다.
      이는 왕실에서 장기적으로 훈련시키기 유리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훈련 과정은 철저했다.
      사내기생이 수행해야 할 주요 역량은 다음과 같았다.

      • 궁중 음악 이론 및 악기 연주:
        거문고, 해금, 대금, 피리 등 정통 악기를 다루는 법
      • 정재(呈才) 무용:
        왕실 행사에서 선보이는 절도 있는 궁중 무용 훈련
      • 시조, 가곡, 노래:
        시를 낭송하고, 감정을 억제하면서도 우아하게 노래하는 법
      • 말투와 표정, 몸짓:
        여성처럼 말하고, 미소 짓고, 섬세하게 손끝을 움직이는 법

      이 모든 과정은 ‘여성처럼 보이는 남성’을 만들기 위한 체계적 설계였다.
      장악원은 사내기생에게서 남성다움이 아닌 여성다움을 요구했다.

      국가가 인증한 ‘예술 공무원’

      사내기생은 단지 예능인이나 접대원이 아니었다.
      이들은 국가의 예술공무원이었다.

      • 정해진 급여를 받고,
      • 직급과 역할에 따라 계급이 나뉘며,
      • 왕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소환되었다.

      예를 들어,
      왕의 생일이나 즉위식, 외국 사신 방문, 궁중 연회 등
      모든 큰 의전 행사에는 사내기생이 배치되었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왕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역할을 맡았다.

      장악원의 한계: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장악원의 기능은 점차 약화되었다.

      • 궁중 의례의 간소화
      • 민간 예능의 대중화
      • 유교 질서의 강화

      이러한 흐름 속에서
      ‘여성처럼 연기하는 남성’이라는 존재는 점점 불편해졌고,
      장악원 자체도 쇠퇴하게 되었다.

      결국 사내기생은
      기록에서 지워지기 시작했고,
      그들의 예술도, 그들의 이름도 역사 속 그림자로 남게 된다.

      장악원은 단순한 훈련기관이 아니었다.
      그곳은 조선이 만든 젠더의 실험장이었고,
      궁중 예술이 국가적 권력과 어떻게 얽혀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이제 우리는 사내기생의 존재를 통해
      국가가 예술과 젠더를 어떻게 설계하고 통제했는가를 다시 바라볼 수 있다.

      5. 왕실이 요구한 여성성, 그 정체는?

      사내기생이 단지 남성이 여성처럼 행동했던 존재였을까?
      표면만 보면 그렇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왕실이 철저하게 기획한 ‘이상화된 여성성’의 이미지가 존재한다.
      이는 실제 여성의 모습이 아니라,
      왕의 품격과 국가 권위를 드러내기 위한 연출된 성 역할이었다.

      여성성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조선 왕실이 사내기생에게 요구한 여성성은
      단순히 '여자처럼 보이라'는 명령이 아니었다.
      그것은 왕 앞에서 우아하고 절제된 몸짓으로
      조선의 ‘예(禮)’와 ‘악(樂)’을 구현하는 문화적 코드였다.

      사내기생이 수행한 여성성은 감정적이거나 자유로운 표현이 아닌,
      철저히 조율된 아름다움이었다.
      이 ‘왕이 보는 여성상’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는다:

      • 절제된 미소와 낮은 목소리
      • 느리고 단정한 걸음걸이
      • 손끝까지 계산된 부드러운 제스처
      • 과하지 않은 장신구와 의복
      • 감정을 억제한 채 정해진 흐름을 따르는 공연

      이것은 현실 여성의 다양한 삶과는 거리가 먼,
      국가가 요구한 상징적 여성성이었다.

      여성처럼 보이되, 실제 여성이어선 안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내기생은 여성성을 구현해야 했지만
      실제 여성은 그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왜일까?

      조선의 유교 사회는
      공적 공간에 여성이 노출되는 것을 금기시했다.
      그러나 왕의 행사나 외교 사절단 접대에는
      부드러운 이미지와 섬세한 예술성이 필요했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존재가
      바로 남자이되 여성처럼 행동하는 사람, 즉 사내기생이었다.

      그들은 왕실이 사회적 윤리를 넘지 않으면서도
      여성적 미학을 무대 위에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조선의 ‘젠더 연출’이었던 사내기생

      결국 사내기생이 보여준 여성성은
      실제 여성의 본질이 아니라,
      왕의 시선을 만족시키기 위한 연출된 정체성이었다.

      그들은 성별 이분법의 틀 안에서
      국가가 요구한 역할을 수행해야 했고,
      그 속에서 진짜 자기 자신을 드러낼 공간은 거의 없었다.

      이것은 곧 오늘날의 젠더 논의와도 이어진다.
      ‘여성처럼 보이기’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여성성’은 고정된 것인가, 아니면 사회가 요구한 허상인가?

      사내기생은 이러한 질문을
      500년 전 조선에서 이미 몸으로 표현했던 존재였다.

      6. 사내기생의 삶은 어땠을까?

      조선의 궁궐 안, 빛나는 연회장이 열릴 때마다
      음악과 춤이 울려 퍼졌고,
      그 중심엔 여성처럼 꾸민 남자들,
      사내기생이 있었다.

      그들은 조선 왕실의 품격을 상징하는 존재였지만,
      그들의 삶은 화려함 이면에 깊은 외로움과 정체성의 갈등을 안고 있었다.

      무대 위의 존재, 무대 밖의 침묵

      사내기생은 궁중에서 ‘필요한 순간’에만 존재를 허용받았다.
      왕의 연회, 외국 사신 접대, 종묘제례악과 같은 중요한 행사에서
      그들은 철저한 리허설 끝에
      완벽히 통제된 움직임과 표정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연회가 끝나고 조명이 꺼지면
      그들은 다시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된다.
      공식적인 이름 없이, 배역이나 직책으로만 기록되었고,
      그들의 사적인 삶은 역사에 남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존재의 이유가 무대 위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셈이다.

      사내기생의 일상: 자유 없는 궁중생활

      그들의 일상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연예인의 삶과는 달랐다.

      • 장악원의 숙소에 기거하며,
      • 지정된 스케줄에 따라 음악, 춤, 매너를 반복 훈련하고,
      • 상급자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자유시간은 거의 없었고,
      외부인과의 접촉도 제한적이었다.
      이들은 왕실 소속 예인으로서
      신분은 낮되, 행동은 귀족처럼 단속받았다.

      연회에서의 실수가 용납되지 않기에
      매일같이 연습하고,
      왕의 시선에 맞는 몸짓을 만들기 위해
      자기 표현을 억제해야 했다.

      성 정체성과 감정, 그들은 누구였는가?

      가장 복잡한 문제는 바로 정체성의 문제였다.
      생물학적으론 남성이지만,
      여성성을 연기해야 했던 사내기생에게
      자아는 어디에 존재했을까?

      •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 타인의 눈에 맞춰 행동하고,
      • 성별 이분법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삶.

      그들은 단순히 남자가 아니었고,
      여자도 아니었다.
      사회가 만든 성 역할 사이에서 살아간 존재였고,
      그들의 고통은 기록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그들의 삶을 다시 조명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역사의 흥밋거리를 넘어서
      당시 사회가 어떻게 성별과 예술, 인간을 통제했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무대는 사라졌지만, 그들은 역사에 존재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궁중 의례는 축소되고,
      장악원은 폐지되며,
      사내기생은 점점 사라졌다.

      그들의 이름은 실록에도 드물고,
      묘비에도, 후손에게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히 존재했고,
      당대 왕실의 문화와 권력을 시각적으로 완성한
      예술의 주체이자 젠더의 경계인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삶을
      단지 ‘특이한 남자들’이 아니라,
      조선의 문화적 실체와 사회의 그림자를 비추는 거울로 보아야 한다.

      7. 오늘날 우리가 사내기생을 다시 조명해야 하는 이유

      사내기생은 조선 시대의 일부였고,
      궁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만 활동한 ‘지나간 인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을 넘어
      오늘날 우리가 ‘성’, ‘예술’, ‘사회적 역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젠더를 다시 묻는 시대, 과거를 다시 본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성 정체성과 표현이 인정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의 경계는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으며,
      성별이라는 고정된 이분법은 점차 유연해지고 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사내기생이라는 존재는
      조선 시대에도 성 역할이 유동적이고 사회적 구성물이었음을 증명하는 사례가 된다.

      그들은 생물학적 성별과 사회가 요구한 성별 사이에서 살아갔고,
      어쩌면 오늘날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젠더퀴어와도 연결되는
      역사적 선조일 수 있다.

      지워진 존재를 복원한다는 것

      사내기생은 조선이 직접 만들고, 조선이 스스로 감췄던 존재다.
      필요했지만 꺼림칙했고,
      화려했지만 기록하길 꺼려했던 존재.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왜 그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는가?
      왜 그들의 흔적은 의궤나 실록의 단편에만 존재하는가?

      지워진 존재를 다시 불러내는 일은,
      역사 속 권력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는 작업
      이다.

      예술은 언제나 경계를 넘는다

      사내기생은 단지 ‘기이한 남자들’이 아니라,
      조선의 예술이 성별과 규범을 어떻게 넘나들며 실현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들은 성별을 연기했고, 권위를 상징했고,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를 지워야 했던 사람들이다.

      예술은 언제나 경계 위에서 피어난다.
      그 경계에서 살아간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 시대 예술과 인간성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일이다.

      우리가 사내기생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 젠더 다양성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넓히기 위해
      • 예술과 권력이 어떻게 인간의 몸을 매개로 작동했는지 보기 위해
      • 침묵 속에 지워진 이들의 존재를 복원하기 위해
      • 역사 교육의 균형과 포용성을 회복하기 위해

      사내기생은 조선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인물이지만,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아야 할 사회적·문화적 거울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과거를 넘어서
      우리 모두에게 질문한다.

      “당신이 당연하다고 여긴 경계는, 누가 만든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