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야의 조선시대 '사내기생'

조선 시대 ‘사내기생’

  • 2025. 5. 31.

    by. 유니야15

    목차

      1. 사내기생, 그 낯선 이름

      ‘사내기생’.
      이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잠시 멈칫하게 된다.
      ‘기생은 여성이 아니었나?’
      ‘남자가 기생이라니, 여장을 했다는 건가?’
      ‘조선시대에도 성적 다양성이 있었던 걸까?’

      그러나 이러한 질문들은 사내기생의 존재를 지나치게 현재의 기준과 감각으로 해석한 결과일 수 있다.
      사내기생은 그 이름부터가 낯설다. 기생이라는 단어는 익숙하지만, ‘사내(남성)’와 함께 붙어버리면 의미가 복잡해지고 모호해진다.
      하지만 이 낯섦은, 우리가 조선시대의 예술 체계와 성별 관념, 궁중 문화의 이면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기생’이라는 단어에 가려진 또 다른 역사

      오늘날 ‘기생’이라는 단어는 흔히 술자리에서 접대를 하던 여성 예인으로 좁게 인식된다.
      그러나 본래 ‘기생(妓生)’은 **‘기예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기(妓)’는 재주와 기예를 뜻하고, ‘생(生)’은 삶을 의미한다.
      즉, 예술 활동을 통해 살아가는 직업인, 그것이 바로 기생의 본래 의미였다.

      따라서 과거에는 성별과 무관하게 ‘기생’이란 명칭이 사용되었으며,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왕실이나 관청에서 국가 행사에 동원되는 남성 예인들을 ‘기생’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들 중에는

      •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
      • 정재(궁중무용)를 추는 무동
      • 노래와 춤을 겸한 예인
        등 다양한 형태의 남성 예능인이 존재했다.

      조선의 궁중 무대 위, 남자 예인이 필요한 이유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정례와 연회가 자주 열렸다.
      이때는 반드시 ‘정재(呈才)’라 불리는 춤과 음악이 함께하는 공연이 진행되었는데,
      이는 단순한 여흥이 아닌 왕의 권위를 드러내고 조선의 질서를 표현하는 공식 퍼포먼스였다.

      그러나 유교 이념이 강화되면서 왕실 여성들이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금기시되었고,
      결국 공연 무대에 여성을 올릴 수 없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남성 무용수이자 배우, 즉 사내기생이었다.

      이들은 여장을 하고 여성 역할을 수행했지만,
      그것은 단지 흉내 내기나 희화화가 아니라, 정식 훈련을 받은 퍼포머로서의 직무 수행이었다.

      • 아름답게 단장하고
      • 여성 캐릭터의 몸짓과 발성, 감정을 표현하며
      • 무대 위에서 여성보다 더 여성다운 몸짓을 구현해냈다.

      이러한 활동은 연출자의 의도에 따라 철저히 기획된 연기였으며,
      당시 예술 수준으로 보면 지금의 오페라, 전통극, 현대 무용에 가까운 수준 높은 퍼포먼스였다.

      대중이 몰랐던 ‘기생’과 ‘사내기생’의 구조적 차이

      사내기생이 여성 기생과 혼동되는 가장 큰 이유는,

      • 외양이 비슷했기 때문이며,
      • ‘기생’이라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과 소속은 분명히 달랐다.

      항목                             여성 기생                                                                 사내기생

       

      소속 교방청, 지방관청 장악원, 왕실 기관
      주요 역할 접대, 춤과 노래, 민간 활동 궁중 정재, 제례 무용, 연주
      활동 공간 민간 연회, 외부 행사 궁중, 왕실 전용 행사
      목적 유흥 및 문화 향유 국가 의례, 공식 퍼포먼스
      성격 개인 중심의 예능인 국가 소속의 전문 인력
       

      즉, 사내기생은 외모와 복장 때문에 ‘기생’으로 불렸을 뿐,
      실제로는 국가가 직접 양성한 전문 예술가, 곧 궁중 예인이었다.

      사내기생, 낯섦 너머의 진짜 정체

      사내기생이라는 단어는 분명 낯설지만,
      그 낯섦은 우리가 조선이라는 시공간의 예술 시스템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해일 뿐이다.

      조선 왕실은 매우 보수적이고 엄격한 구조였지만, 동시에 화려한 예술과 엄정한 의례를 유지해야 했다.
      그 미묘한 균형 속에서 등장한 사내기생은,
      그 어떤 여성보다 아름다웠고, 그 어떤 예인보다 정교했다.

      그들은 조선의 정재를 오늘까지 이어온 전통 퍼포먼스의 원형이자,
      왕실 문화의 격조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사내기생은 기생일까, 예인일까?
      그들은 기생이라는 이름을 지녔지만, 그 본질은 **‘국가의 얼굴을 무대 위에서 구현해낸 남성 예술가’**였다.

      2. 왜 남자에게 ‘기생’이라는 호칭이 붙었는가

      ‘기생’이라는 호칭은 오늘날에는 대부분 여성을 떠올리게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남성에게도 ‘기생’이라는 명칭이 붙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사내기생’**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남성에게 ‘기생’이라는 여성 중심의 호칭이 사용되었을까요?
      이는 단지 외형적 흉내나 성 역할의 전도 때문이 아니라, 조선의 예술 체계와 언어 사용, 제도적 명칭 구조의 총합적 결과였습니다.

      기생이라는 단어의 원래 뜻부터 되짚어보자

      ‘기생(妓生)’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접객 여성을 의미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한자적으로 보면 그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 기(妓): 기예, 예술, 재주
      • 생(生): 생계, 삶, 또는 살아가는 자

      즉, 기생은 ‘기예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 다시 말해 예술 활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전문 예능인을 의미했습니다.
      이 정의에는 남녀의 성별 구분이 포함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고려 시대와 조선 초기를 포함한 다양한 시기에는 성별과 관계없이 기예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을 기생이라고 통칭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조선 후기 이후 여성 기생이 대중적으로 부각되면서 ‘기생 = 여성’이라는 고정관념이 생겨났을 뿐입니다.

      제도적 이유: 조선의 궁중 예술 체계 속 ‘기생’ 명칭의 사용

      조선 시대에는 궁중의 음악, 무용, 의례를 담당하는 전문 기관인 **‘장악원(掌樂院)’**이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다양한 공연 예술 인력이 배치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무용과 노래, 연주를 겸하는 남성 예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악원 소속 남성 예인 중 특정한 춤과 복장, 역할을 맡는 이들이 여성 기생처럼 보이는 활동을 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들을 **‘사내기생’**이라 지칭하게 된 것입니다.

      • 그들은 여성처럼 옷을 입고
      • 여성의 몸짓과 감정을 연기하며
      • 궁중 무용의 ‘여성 캐릭터’를 맡아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여장 퍼포먼스가 아니라, 정교한 궁중 무대 연출의 일부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남성 기예인'이자 '기예로 생계유지하는 사람'으로서의 기생, 즉 기생의 원의미를 충실히 따르는 존재였던 셈입니다.

      문화적 이유: 여성 무용이 금지된 유교적 질서 속에서의 대안

      조선은 유교 국가였고, 유교적 관념은 여성의 외부 노출과 공적 무대 출연을 금지하는 방향으로 작동했습니다.
      이에 따라 여성 예술인이 왕실 무대에 직접 서는 것은 체면과 질서에 어긋나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궁중의 예술, 특히 정재(呈才) 같은 무용은

      • 여성적인 움직임이 필요했고,
      • 여성의 복장과 분위기를 구현해야만 했습니다.

      결국 여성의 몸으로는 서지 못하는 무대에, 남성이 여장을 하고 등장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졌고,
      이들은 외형적으로는 기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궁중 무대를 위한 필수적 대체 인력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생’이라는 호칭이 성별이 아닌 무대 위의 역할과 기능에 따라 붙게 되었던 것입니다.

      외형이 아닌 기능 중심의 호칭 사용 관습

      조선시대에는 사회적 호칭이 외모나 성 정체성보다는 기능과 역할 중심으로 부여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 남성이 ‘의녀’ 역할을 할 수 없지만,
      • 여성이 ‘의관’ 역할을 맡을 수 있었고,
      • 무수리나 나인 등 궁중 직책도 기능에 따라 나뉘었지, 성별만으로 단정되지 않았습니다.

      ‘기생’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자니까 기생’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예술 활동을 통해 어떤 무대에 서는가에 따라 ‘기생’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내기생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여장 남성이라는 이미지가 아닌,
      ‘궁중 예술의 여성적 역할을 수행한 남성 예인’이라는 매우 정교한 문화적 위치를 설명하는 말이었습니다.

      후대의 왜곡된 인식: 사내기생을 ‘풍기문란’의 상징으로 본 시선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이후로, 사내기생에 대한 기록은 점점 줄어들고,
      민간에서의 풍속문란, 성적 일탈 등과 혼합된 이야기들이 등장하면서 사내기생의 본래 역할이 왜곡되기 시작합니다.

      • “남자가 여자 옷을 입었으니 이상하다.”
      • “그들은 여장을 즐긴 성적 소수자였다.”
      • “풍속을 문란하게 한 존재다.”

      이러한 시선은 모두 후대의 윤리 기준, 성 고정관념, 이성애 중심적 시각에서 비롯된 오류이며,
      당시 사내기생들이 수행한 역할과 예술성, 그리고 국가적 공적 업무로서의 위상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오해입니다.

      기생이라는 호칭은 성별이 아니라 ‘역할’에 대한 이름이었다

      사내기생이라는 명칭은 단순히

      • 여장을 했다거나,
      • 기생과 함께 활동했다거나,
      • 성적 혼란의 상징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조선의 궁중 예술을 완성하기 위해 탄생한 제도적 역할자였고,
      그들은 ‘기생’이라는 이름을 통해 예술적 전문성과 기능적 정체성을 동시에 갖춘 존재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내기생을 바라볼 때 가장 먼저 바꿔야 할 인식은 이것이다:
      “그들은 여장을 한 남자가 아니라, 궁중 무대를 지킨 국가 공인의 예인(藝人)이었다.”

      기생이 아닌 예인! 사내기생에 대한 오해와 진실

      3. 장악원과 궁중 의례의 핵심 인력

      사내기생을 단순히 '여장을 한 남성' 혹은 '기이한 존재'로 오해하는 이유는, 그들이 실제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예술 행정 체계를 살펴보면, 사내기생은 단순한 연기자나 무용수가 아니라, 국가의 권위와 위엄을 예술로 구현한 핵심 인력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중심에는 바로 **장악원(掌樂院)**이라는 국가기관이 존재한다.

      장악원이란 무엇인가?

      장악원은 조선시대 왕실의 음악, 무용, 의례를 총괄한 관청이다.
      고려 시대 '관현방'과 조선 전기 '악학'의 전통을 잇는 기관으로,

      • 궁중 의례 음악의 작곡과 연주,
      • 정재(呈才)라고 불리는 궁중무용의 지도 및 실연,
      • 악기 제작, 무용복 제작, 의전 연출에 이르기까지
        왕실 문화 예술의 전반을 총괄했다.

      이곳에는 수많은 전문 악공(樂工), 무동(舞童), 악생(樂生), 기생(妓生) 들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이들 중 일부가 바로 사내기생이었다.

      사내기생은 장악원의 ‘퍼포먼스 실연자’

      사내기생은 장악원 내에서도 궁중 연회의 퍼포먼스를 실연하는 최전방 인력이었다.
      그들이 맡았던 주요 역할은 다음과 같다:

      정재(呈才) 공연

      • 정재는 조선의 궁중무용으로, **왕에게 바치는 헌무(獻舞)**의 일종이다.
      • 대표적인 정재인 「춘앵전」, 「처용무」, 「향발무」 등은 모두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고, 조선의 미학을 집대성한 무대였다.
      • 이러한 춤은 여성적 동작이 요구되지만, 여성 궁중인이 외부 무대에 나설 수 없었기 때문에 남성 예인들이 여장하고 수행해야 했다.

      왕실 연향 연출 및 보조

      • 사내기생은 단순히 무대 위에서 춤만 추는 것이 아니라, 연향의 흐름을 따라 의상, 장단, 무대 전환, 대사 처리, 악기 리듬의 교정 등 다채로운 예술 요소를 통합해야 했다.
      • 특히 대형 연향에서는 10~30명의 사내기생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대형 군무를 구성했고, 이는 지금의 ‘퍼포먼스 디렉터’에 가까운 수준의 예술 집행자였다.

      제례의식 참여

      • 종묘제례악, 사직단제 등 왕실과 조정의 공식 의례에는 단순 음악뿐 아니라 무용도 함께 올려졌다.
      • 사내기생은 이러한 의식에 맞춰 엄숙하면서도 정교한 움직임으로 의례의 품격을 살리는 역할을 했다.

      장악원에서의 위상: 단순한 하인이 아닌 ‘전문 관인’

      사내기생은 비록 양반 신분은 아니었지만, 궁중에서 훈련받고 실전 무대에 서는 고급 기능인이었다.
      장악원은 이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다음과 같은 시스템을 운영했다.

      • 입소 전 무예·기예 테스트 통과
      • 상하 근무 등급제: 실력과 경력에 따라 무등급 → 3등 → 2등 → 1등으로 승급
      • 보상과 처벌이 명확한 공무 체계
      • 교관(敎官) 역할 수행: 실력이 뛰어난 사내기생은 후배 예인을 교육하고 지도할 수 있는 위치로 승진하기도 했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는 사내기생을 단순한 연회용 연기자가 아니라, 조선 궁중 예술 체계의 기반을 지탱하는 핵심 인력으로서 인식하게 만든다.

      왕실의 신임을 받다

      사내기생은 실제로 왕의 총애를 받는 존재이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 및 승정원일기에는 왕이 정재를 본 뒤 특정 예인의 이름을 언급하며

      • “춤이 매우 절제되어 있다.”
      • “가무가 정성스럽다.”
      • “보상이 마땅하다.”
        는 등의 평을 남긴 사례가 다수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일부 사내기생은 왕의 지시로 특별 하사품을 받거나, 별도의 악사 신분을 부여받아 궁중에 상주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록은 그들이 단순한 무대 도구가 아니라, 왕실 문화의 품격을 구현하는 핵심 창작자이자 실행자였음을 방증한다.

      예술의 전승자이자 창조자

      사내기생은 단지 기존의 춤을 따라 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기존 무용을 발전시키고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는 데에도 관여했다.

      • 정재의 안무를 조정하거나
      • 악보에 따라 움직임을 개량하거나
      • 무대의 구성을 효율적으로 바꾸는 공동 창작의 주체였으며
      • 궁중무용의 시범자이자 보존자, 전승자의 역할까지 맡았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는 사내기생 출신들이 궁중 예술의 연출자, 지휘자, 교관으로 활동한 기록도 확인된다.
      이로써 우리는 사내기생을 공연 예술의 실무 전문가이자, 조선 문화의 중요한 전승 주체로 재조명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사내기생은 단순한 ‘여장한 남자’가 아니라,
      장악원이라는 국가 기관에 소속되어 왕실의 의례와 예술을 구현한 공식 인력,
      즉 조선 궁중문화의 예술성과 권위를 지탱한 무대 위의 예인 중 예인이었다.

      4. 기생인가, 예인인가 – 혼란의 시작

      사내기생이라는 존재를 바라볼 때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혼란은 단 하나의 질문으로 압축됩니다.
      “그들은 과연 기생인가, 예인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명칭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신분, 역할, 성별, 미학, 사회적 인식 등 여러 층위의 의미가 얽혀 있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도, 그리고 후대의 학자들도 이 질문에 명확히 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내기생이라는 존재 자체가 애초에 경계 위에 선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애매한 명칭의 문제: ‘기생’과 ‘예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기생’과 ‘예인’을 동일한 개념처럼 사용하기도 하지만,
      사실 두 단어는 중첩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 기생(妓生):
        전통적으로는 ‘기예로 생계를 잇는 사람’이라는 의미지만,
        조선 후기로 가면서 점차 ‘접객 여성’이라는 이미지로 고정됨.
        이는 민간 유흥 공간에서 활동하던 여성 기생이 대중문화에 노출되면서 생긴 인식 변화였다.
      • 예인(藝人):
        문자 그대로 ‘예술인’.
        예인이라는 말에는 신분, 성별, 접객 여부 같은 요소가 배제되며,
        전문 예술가로서의 기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내기생은 조선 전기까지는 ‘기예를 가진 예인’으로서 ‘기생’이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사용했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기생’이라는 말의 사회적 이미지가 왜곡되면서
      사내기생도 함께 그 오해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혼란의 시작점: 조선 후기의 유교적 질서 강화와 ‘성적 도덕성’의 확대

      조선 후기로 가면서 성리학적 가치관이 사회 전반에 강하게 작용하게 됩니다.
      특히 영·정조 이후로는 풍속 단속과 도덕 규범 강화가 전 사회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다음과 같은 변화가 발생합니다:

      • 여성 기생은 점차 문학적 동반자, 예술인에서 유흥 접객자로 이미지가 변질됨.
      • 남성 기예인은 ‘여성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 자체가 풍기문란 혹은 도리 위반으로 간주됨.
      • 사내기생은 궁중에서는 여전히 기능을 수행했지만, 민간에서는 기피 대상 혹은 이상한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함.

      결국 ‘기생’이라는 말은 도덕적 오명과 함께 예인으로서의 정체성까지 흐리게 만드는 명칭이 되어버렸고,
      사내기생 역시 그 경계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기록의 언어도 혼란을 반영하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의궤 같은 공식 기록에서도
      사내기생을 지칭하는 언어는 일정하지 않습니다.

      • 어떤 문서에서는 ‘남기생(男妓生)’,
      • 다른 곳에서는 ‘무동(舞童)’,
      • 혹은 ‘악공(樂工)’,
      • 혹은 단순히 **‘기생’**으로만 쓰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표현의 혼용은 사내기생이 당시 사람들에게도 단순히 규정되지 않는 존재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무대를 위해 여자처럼 꾸몄지만, 실제로는 남성이고,
      접대를 하지 않았지만, 기생이라 불렸으며,
      공식 인력이었지만, 하인 취급도 받았습니다.

      즉, 그들은 조선 예술 체계 내에서도 **‘이름 붙일 수 없는 예술가’**였던 것입니다.

      후대의 시선이 낳은 오해와 희화화

      일제강점기와 근대화 이후 사내기생에 대한 시선은 더 심각하게 왜곡됩니다.
      이 시기의 출판물이나 신문 기사에서는 사내기생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 “여장한 남자들의 음탕한 무대”
      • “풍속 문란의 상징”
      • “도덕을 해치는 존재”
      • “성적 정체성이 불분명한 괴이한 기예인”

      이는 성에 대한 근대적 시선, 즉 이분법적 성별 규범과 이성애 중심 사고가 강화된 시기의 산물입니다.
      과거에는 예술적 연출의 일환으로 받아들여졌던 사내기생의 여장과 무대 활동이
      이 시기에는 성적 일탈이나 기이한 취미로 오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 그들의 예술성은 잊히고,
      • 풍속적 논란만 남게 되었으며,
      • ‘기생인가 예인인가’라는 정체성 혼란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제 우리는 사내기생을 다시 보아야 한다.
      단지 그들이 ‘기생’이었는지, ‘예인’이었는지를 따지기보다는,
      그들이 어떤 예술을 수행했고,
      어떤 시스템 안에서 활동했고,
      왜 그러한 복장과 역할을 맡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 그들은 장악원의 일원으로서
      • 조선의 의례와 예술을 구현했고
      • 무대를 통해 왕실 권위를 시각화했으며
      • 자신에게 주어진 연기와 무용을 철저한 훈련을 통해 수행한 예인이었다.

      기생이라는 명칭은 제도적 표현일 뿐,
      그들의 실체는 문화와 권위, 그리고 예술을 몸으로 구현한 퍼포머였다.


      ‘기생인가 예인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사내기생에게는 불완전한 질문일 수 있다.
      그들은 경계에 있었고, 동시에 중심에 있었으며,
      낯설게 보였지만 예술의 전통을 계승한 사람들이었다.

      ‘기생’이라는 이름 너머에 있던 **진짜 정체성은, 국가가 인정한 예술가 – 예인(藝人)**이었다.

      5. 사내기생에 대한 오해와 편견

      사내기생이라는 존재를 마주했을 때, 사람들은 흔히 고개를 갸웃한다.
      ‘남자가 기생이었다니,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조선시대에도 젠더가 유동적이었단 말인가?’
      ‘풍속 문란의 상징 아니었어?’
      이러한 반응은 단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누적된 왜곡과 편견, 그리고 시대에 따라 변한 시선이 만들어낸 결과다.

      사내기생은 분명 존재했지만, 기록에서 왜곡되었고,
      후대의 상상 속에서 비틀려 기억되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정체불명의 인물’로 소비되고 있다.

      이 장에서는 그들이 겪은 대표적인 오해와 편견을 조목조목 짚고,
      그 이면에 숨은 진실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오해 1: 사내기생은 여장을 즐긴 성 소수자였다?

      가장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사내기생을 ‘성 정체성이 독특한 사람’, 혹은 ‘트랜스젠더의 조상’쯤으로 해석하는 시선이다.
      이는 현대의 성 소수자 개념을 무리하게 과거에 투영한 결과다.

      사내기생은 여장을 하긴 했지만, 이는 **연기를 위한 ‘무대 분장’**이었다.
      그들은 여성처럼 보이기 위해 복식과 화장을 했고, 여성의 몸짓과 말투를 연습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술적 수행의 일환이자, 궁중 연출의 필요에 따른 ‘역할 수행’**이었다.

      즉,

      • 그들은 남성 신분을 유지했고,
      • 장악원 소속으로서 국가 행사에 동원되는 공적 인물이었으며,
      • 여장 자체를 개인적 취향이 아닌, 직업적 의무로 받아들였다.

      이를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과 연결하는 것은 당시의 제도와 문화 맥락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해석이다.

      오해 2: 사내기생은 풍속을 문란하게 한 존재였다?

      조선 후기나 일제강점기 문헌에는 사내기생을 **‘풍속 문란의 상징’**처럼 묘사한 기록이 간간히 등장한다.
      특히 남색(男色)에 대한 금기와 성리학적 가치관이 강해진 시기에는

      • “남자가 여자처럼 화장하고 옷을 입고 춤을 춘다”는 사실만으로도
      •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시대적 맥락을 완전히 무시한 결과다.
      사내기생이 활동하던 무대는 단지 여흥의 자리가 아니었다.

      • 왕실의 공식 행사,
      • 외국 사신 접대,
      • 종묘사직의 제례,
      • 연향이라는 국가 의례였다.

      여기서 그들의 춤과 음악은 조선의 권위와 문화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도구였으며,
      그 존재는 음란함이 아니라 ‘엄정함’과 ‘화려함’을 표현하는 매개체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 이후 기생이라는 단어가 민간 유흥 문화와 접점이 많아지며,
      그에 따른 부정적 이미지가 사내기생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확산된 것이다.

      오해 3: 사내기생은 기생에 불과했고, 낮은 신분이었다?

      사내기생이라는 말 자체에서 ‘기생’이라는 단어가 포함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은 이들이 단지 ‘하급 예능인’이거나 ‘접객자’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내기생은 대부분 장악원 소속 예인으로,
      왕의 명령을 받는 공적 의례 담당자였다.

      • 정식 시험을 거쳐 장악원에 선발되었고,
      • 실력에 따라 직급이 나뉘었으며,
      • 일정 수준 이상의 인물은 교관으로서 후배를 가르치는 위치에까지 올랐다.

      그들은 궁중문화의 정수를 이끌었던 전문직 예술인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국립예술단의 주무용수이자 연출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기생이라는 단어에 덧씌워진 '접대'의 이미지 때문에 그 위상이 낮게 여겨졌을 뿐,
      실제 역할은 전혀 달랐다.

      오해 4: 사내기생은 단순한 여장 광대였다?

      사내기생의 퍼포먼스는 종종 ‘희화화’된 시선으로 소비되기도 했다.

      • “여자처럼 행동하니 우스꽝스럽다.”
      • “남자가 춤을 추면 우습고 어색하다.”
        이런 말들은 단지 성 역할 고정관념에서 나온 편견일 뿐이다.

      그러나 사내기생의 무용은 엄격한 규율과 훈련을 거친 고급 예술이었다.
      그들이 추었던 춤, 예를 들면 「춘앵전」이나 「향발무」 같은 정재는

      • 손끝과 눈동자의 움직임까지 계산된 정교한 안무로
      • 궁중의 이상적 미를 표현하기 위한 종합예술이었다.

      이것은 절대 즉흥적이거나 우스운 ‘광대 놀음’이 아니었다.
      그들은 조선 최고의 예인으로서
      예술성과 절제, 품위를 갖춘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왕의 평가를 직접 받는 국가 문화 담당자였다.

      오해 5: 사내기생은 역사에 없던 존재였다?

      오늘날 교과서나 대중 역사 콘텐츠에서는 사내기생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존재했지만 기록되지 않았거나, 일부러 외면되었기 때문이다.

      • 유교적 도덕관념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기록에서 배제되고,
      • 여성 기생 중심으로 대중적 관심이 쏠리며
      • 사내기생은 역사적 주인공이 아닌, 주석이나 주변 인물로 밀려나 버렸다.

      그러나 왕실의 연향도를 보면,
      무대 중앙에서 춤추는 사내기생의 모습이 자주 그려져 있다.
      그들은 실제로 있었고, 조선의 무대 위를 채운 중요한 예술가였다.
      기록되지 않았을 뿐, 지워지지 않은 흔적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사내기생에 대한 오해는 ‘단어’에서 비롯되고, ‘시대의 시선’에서 증폭되었다

      기생이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그들은 불명예를 뒤집어썼고,
      예인으로서의 정체성은 흐려졌으며,
      오늘날까지도 제대로 된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되돌아봐야 한다.
      그들이 추었던 춤, 입었던 복식, 수행했던 역할은
      모두 조선이라는 국가의 문화 정체성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사내기생은 기생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시대의 벽을 넘어 조선 예술을 무대 위에 구현한 ‘예인’이었다.

      6.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예인’으로서의 사내기생

      사내기생은 분명히 기생이라는 명칭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은 접대용 예인이 아니라 조선 궁중의 정식 예술가, 즉 **‘남성 예인’**이었다.

      그들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신, 미학, 격식을 몸으로 표현하고 지켜낸 존재였으며,
      왕실의 권위를 예술로 구현해낸 문화 퍼포머였다.

      오늘날 우리가 사내기생을 바라볼 때, 중요한 것은 단순한 외양이나 성별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이 남긴 예술의 흔적, 궁중 문화의 정수, 그리고 잊혀진 전통의 무게를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