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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조선에도 성소수자가 존재했는가?
조선 시대에 성소수자가 존재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 그 이상이다.
현대 사회에서 성소수자(LGBTQIA+)는 정체성과 인권의 문제로 논의되지만,
조선 시대에는 ‘성소수자’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러 역사적 사례와 문헌, 그리고 예술 속 장면들에서
성적 지향, 젠더 표현, 성별 정체성의 다양성을 암시하는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성소수자’라는 말이 없었다고,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오늘날과 같은 정체성 분류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별 이분법을 넘나드는 인물이나,
동성 간 애정을 표현하거나,
사회적 성 역할을 뒤바꾼 인물들은 여러 문헌 속에 등장한다.예를 들어,
- **남색(男色)**이라는 표현은 조선 후기 문학과 야사에서 흔히 발견된다.
- ‘도련님이 하인을 애첩으로 삼았다’, ‘젊은 승려들이 깊은 관계를 맺었다’는 기록은 단순한 문학 장치가 아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당시 사회가 ‘다른 형태의 성적 관계’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즉, 존재는 했지만 공식적이지 않았고, 금기되었고, 비가시화되었을 뿐이다.
단서로 남은 흔적들
조선 사회는 유교 윤리에 기반한 철저한 가부장적 구조였다.
따라서 성소수자의 존재는 쉽게 가시화되거나 기록되지 않았다.
하지만 숨겨진 구절, 비유와 은유, 의례의 틈, 예술과 연희,
그리고 무엇보다 사내기생 같은 경계적 존재들이 그 단서가 되어준다.사내기생은 남성이면서 여성의 역할을 수행했고,
그 행위는 단순한 예술적 연출을 넘어
사회가 허용한 유일한 성적 모호성의 제도화된 형태였다.뿐만 아니라,
- 여성이 남장을 하고 관직을 지망했던 사례
- 동성 간의 애정을 다룬 민간 설화
- 남장을 한 여성이 부인의 첩으로 들어갔다는 일화
등은 모두 젠더 표현과 성 정체성의 유연성을 시사하는 역사적 장면이다.
조선 시대에도 ‘퀴어한 순간들’은 있었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성소수자’라는 용어는 현대의 사회적 개념이다.
하지만 ‘퀴어(Queer)’라는 단어는 단지 성 정체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 질서와 규범을 흐리고, 성 역할을 뒤흔들며, 경계를 넘나드는 모든 존재를 포괄한다.그런 면에서 조선은 수많은 퀴어한 순간들로 구성된 사회였다.
단지 그것이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며,
의도적으로 말해지지 않았을 뿐이다.오늘 우리가 해야 할 질문
“조선에도 성소수자가 있었을까?”라는 질문은
역사 속에서 사라진 존재들을 소환하는 질문이다.이 질문은 곧 이렇게 바뀔 수 있다.
- 왜 우리는 그들을 기록하지 않았는가?
- 어떤 이유로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취급되었는가?
- 우리는 그 빈자리를 어떻게 메울 수 있는가?
사내기생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입구이자, 통로이자, 실마리다.
그들은 존재했고, 체계 속에 배치되었으며,
‘허용된 젠더 유연성’의 틈새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이제는 그 흔적을 따라
조선이라는 시대 안에 숨어 있는 성적 다양성과 정체성의 스펙트럼을
다시 읽고, 다시 쓰는 일이 필요하다.2. 사내기생은 누구였는가
사내기생.
한자어로 보면 단순하다. ‘사내(남자)’ + ‘기생(예인)’.
하지만 이 단순한 조합 안에는 조선 사회가 감추고 싶었던 경계와 혼성의 흔적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남자이면서 여성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무대 위에서 젠더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였다.
사내기생은 조선 궁중 문화 속에 뚜렷하게 존재했지만, 대부분 기록되지 않았고, 이름조차 남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선의 의례 체계, 장악원 제도, 정재 무용 문헌, 그리고 궁중 연향의 풍속도를 통해 그들의 존재를 추적할 수 있다.사내기생의 등장 배경 – 여성의 부재에서 출발하다
조선 초부터 궁중에서 음악과 무용은 국가 의례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유교 윤리에 따라 여성은 궁궐 안에서 외부 인사를 상대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여겨졌다.
그 결과, 궁중 연향이나 외국 사신 접대 등 공적인 자리에서
‘여성처럼 보이지만, 남성으로 구성된 예인 집단’이 필요하게 되었다.그게 바로 사내기생의 제도적 기원이다.
즉, 이들은 단순히 예술적 필요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유교 사회의 도덕적 긴장을 해소하는 타협의 산물이었다.장악원의 체계 아래 훈련된 정식 예인
사내기생은 민간의 떠돌이 예인이 아니다.
이들은 엄격한 훈련 체계 안에서 자라났고, 조선의 국립 음악기관인 **장악원(掌樂院)**에서 정식으로 교육받았다.장악원은 왕실 음악과 무용, 악기 연주 등을 전담하는 기관으로
어린 시절부터 발탁된 소년들을 가창, 무용, 악기, 화장, 의복, 예법 등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궁중 퍼포머’로 양성했다.이들은 단순한 퍼포머가 아니었다.
국가의 얼굴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였으며,
정재라는 무용을 통해 왕의 권위와 국가의 질서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인물들이었다.남자의 얼굴, 여자의 장신 – 경계 위의 존재
사내기생은 남성이지만, 무대 위에서 여성처럼 꾸미고 행동했다.
이때 사용된 장신구, 복식, 화장법은 단순히 여성의 모방이 아니었다.
그것은 철저히 국가적 필요에 의해 기획된 젠더 연출이었다.사내기생의 머리는 쪽을 틀거나 족두리를 쓰고,
얼굴엔 하얀 분과 붉은 입술, 선명한 눈썹으로 여성미를 강조했으며,
손끝과 발끝의 움직임까지 정제된 여성적 표현을 따라 연습했다.그러나 이들은 실제 여성은 아니었고,
그 정체성은 ‘여자처럼 연기하는 남자’라는 중성적 상태에 가까웠다.이러한 젠더의 유동성은,
조선이 엄격한 유교 질서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성역할의 틈새를 허용했던 기묘한 역설을 보여준다.이름 없는 기록 속, 구조화된 익명성
사내기생의 존재는 분명했고, 그들은 국가 의례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대부분 역사서에 남지 않는다.“기생 여럿이 정재를 추었다.”
“기생이 가락을 불렀다.”
이런 식의 표현은 사내기생을 기능적 존재로만 기록하며,
개인의 서사와 정체성을 지워버렸다.이는 조선 사회가 이들을 **‘필요하지만, 말해지지 않아야 할 존재’**로 인식했다는 뜻이다.
단지 기생이 아니라, 젠더의 퍼포머
우리는 사내기생을 단지 ‘남자 기생’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조선의 예술가였고,
국가의 퍼포먼스를 수행한 대표자였으며,
동시에 사회 질서의 틈새에서 젠더 유연성을 보여준 상징적 인물이었다.사내기생은 존재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였다.
“성은 고정될 수 있는가?”
“남성성과 여성성은 본질적인가, 수행되는 것인가?”
그들은 무대 위에서 이 질문을 몸으로 던진 존재였고,
그런 의미에서 조선 시대 성소수자 문화의 흔적을 간직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3. 남성의 몸, 여성의 역할 – 젠더의 유연성
사내기생은 생물학적으로 남성이지만, 여성의 역할을 연기하며 조선 사회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들은 단지 여장을 한 남자가 아니라, 국가가 필요에 의해 여성의 정체성을 위임한 퍼포먼스 수행자였다.
이러한 존재는 당시로서는 예외적이며 특수한 케이스였지만,
그 자체로 성별 이분법이 절대적이지 않았다는 역사적 증거가 된다.
사내기생은 조선 사회가 보여준 '성별 수행성(gender performativity)'의 대표적인 사례로,
지금의 젠더 유연성(gender fluidity) 개념과 깊게 맞닿아 있다.젠더는 본질이 아닌 수행이다
현대 젠더 이론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젠더는 행위(performance)다’라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성별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반복적으로 연기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사내기생은 이러한 개념을 조선의 무대 위에서 완벽히 구현했다.
그들은 남성이지만 여성의 몸짓을 반복적으로 연습하고, 익히고, 수행했다.
말투, 자세, 시선의 각도, 손끝의 흐름, 춤의 리듬까지 철저히 여성의 언어를 내면화했다.즉, 그들의 젠더는 연기되었으며, 반복되었고, 그래서 사회적으로 ‘성별’로 기능했다.
사내기생의 존재는 단순한 기예가 아니라, 성별이라는 사회적 구성물에 대한 물리적 실천이었다.무대 위에서 완성된 또 다른 성
사내기생은 장악원에서 소년기부터 훈련을 받으며
무대 위에서의 '여성성'을 신체에 익혔다.
그들이 연기한 여성은 단순한 모방이 아닌, 조선 사회가 이상화한 ‘궁중의 여성’이었다.- 행동은 절제되었고
- 움직임은 우아했으며
- 감정 표현은 과장되거나 노골적이지 않되 섬세했다
그들은 본래 남성이지만,
공식적인 궁중 퍼포먼스에서 여성으로 기능하는 제도적 존재였으며,
그 신체는 젠더 수행의 도구이자 상징이 되었다.조선의 엄격한 성 역할 구조 안에서
이러한 ‘성별 교차’가 공적으로 허용된 유일한 사례가 바로 사내기생이었다.정체성의 복잡성 – 남성인가, 여성인가, 제3의 존재인가?
사내기생의 존재는 단지 ‘남자인데 여장을 한 예술가’라는 단순한 틀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들은 사적으로는 남성으로 인정받았지만,
공적인 무대 위에서는 여성으로 보이고 여성의 역할을 수행했다.이러한 이중적 정체성은
단지 생물학적 성(Sex)과 사회적 성(Gender)의 분리만을 넘어
조선 사회가 감당해야 했던 정체성의 모호함을 보여준다.그들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었다.
때로는 둘 다였고, 때로는 제3의 존재처럼 기능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논바이너리(non-binary)’ 또는 ‘젠더 플루이드’와 유사한 위치였다.조선은 명시적으로 성소수자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내기생이라는 존재는 분명히 그 경계를 체현하고 있었다.조선 사회가 허용한 성의 유동성
유교 사회인 조선은 성 윤리에 있어 보수적이었고,
남녀 유별, 부부유별, 부창부수의 이념이 뿌리 깊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사회 안에서조차
젊은 남성이 여성성을 연기하며 무대에 서는 것은 허용되었다.물론 그 허용은 제한적이고 제도화된 틀 안에서만 가능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제도적으로 젠더의 유동성이 존재했음을 입증한다.- 사내기생은 궁중이라는 폐쇄된 공간 안에서
- 특정 의례와 행사를 위한 존재로서
- ‘공적 여성 역할’을 수행하는 ‘남성 예술가’로 승인받았다.
이는 조선 사회가 젠더를 ‘절대적’으로 보지 않았으며,
역할과 기능에 따라 사회적 성별이 유동적으로 배분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젠더의 해체는 조선에도 있었다
우리는 종종 조선을 ‘엄격한 유교 국가’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그 안에도 균열이 있었다.
사내기생은 그 균열의 틈으로 드러난 존재였다.그들은 젠더 고정관념을 무너뜨렸고,
성별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연기되고, 훈련되며, 역할화되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존재했던 사실 하나만으로도
성은 절대적이지 않고, 역사적이며 사회적 구성물임을 증명한다.4. 궁중 무대 위 성 역할의 전복
조선 사회는 엄격한 성별 구분과 위계 속에서 유지되었다.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안살림’이라는 유교적 이념은 법과 제도, 일상 문화 전반에 스며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질서가 철저히 유지되었을 것이라는 통념은 사실과 다르다.
바로 궁중 무대 위, 사내기생이 여성성을 수행하는 장면에서
조선의 성 역할 규범은 한순간 해체되었고, 정해진 성별 구도가 전복되는 순간이 만들어졌다.무대는 또 하나의 세계였다
왕의 권위와 국가의 정통성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
그것이 바로 궁중 연향과 정재였다.
이 무대는 단순한 ‘놀이’나 ‘흥을 돋우는 자리’가 아니었다.
왕이 곧 국가인 시대에, 왕 앞의 연회는 국가적 행사였고 정치 그 자체였다.그 중심에 선 이들이 바로 사내기생이었다.
그들은 왕과 대신, 외국 사신이 보는 앞에서
붉은 치마와 고운 저고리를 입고,
하얀 분과 붉은 입술로 장식한 얼굴을 한 채
우아한 손짓과 발끝으로 ‘여성의 아름다움’을 연기했다.이 장면은 조선 유교 질서 속에서 보면 충격적인 설정이다.
공적인 자리에서, 남성이 여성을 연기하고 여성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것은 성 역할의 일시적 전복이며, 사회적 경계를 흐리는 순간이었다.허용된 여성성의 모방
사내기생의 퍼포먼스는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 ‘허용’은 제도적 장치 안에 철저히 제한된 것이었다.
- 그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여성성을 표현할 수 없었고
- 무대 아래에서는 여장을 하지 않았으며
- 철저히 훈련되고 통제된 틀 안에서만 여성 역할을 연기할 수 있었다.
이처럼 궁중의 무대는 조선 사회에서 유일하게
젠더의 규범이 허물어지는 공간이자
국가가 주도하여 성 역할을 잠시 뒤집는 장치였다.왕실은 이 무대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시각화하는 동시에
사회 질서의 유연성을 통제된 방식으로 드러냈다.즉, 사내기생은 반역자가 아닌,
국가 질서 안에서 ‘계획된 젠더 전복’을 수행하는 예인이었다.성 역할 전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내기생의 존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왜 조선은 성 역할을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무대 위에서는 그 질서를 뒤집었을까?그 답은 의례성과 상징성에 있다.
궁중 연향은 사회가 바라는 이상을 예술적으로 구현한 무대였다.
그 이상 속에는 여성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움, 절제된 감정과 우아함이 핵심 코드로 포함되어 있었다.하지만 실제 여성은 정치적 이유로 그 자리에 설 수 없었다.
그래서 국가는 남성 예인을 여성처럼 연기시키는 방식으로
‘여성성’을 대리 연출한 것이다.이 과정에서 사내기생은 성별이라는 구분을 넘어서
**사회적 역할로서의 성(Gender as a role)**을 수행하며
조선 사회의 이중적 윤리와 시선을 몸으로 표현했다.연기인가, 위장인가, 수행인가?
사내기생의 여성성은 어디까지가 ‘연기’였고,
어디까지가 그들의 내면화된 정체성이었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역사적 궁금증이 아니라
젠더 정체성과 사회적 수용성에 대한 본질적 문제로 이어진다.- 그들은 젠더를 연기했지만,
- 그 연기는 반복되며 체화되었고,
- 결국 사회 안에서 또 하나의 ‘가능한 젠더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 역할의 뒤섞임은
조선이라는 보수적인 시공간 속에서도
젠더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유동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성 역할 전복이 의미하는 것
사내기생은 조선 궁중에서 일시적으로 여성성을 허용받은 남성이었지만,
그 존재는 단순한 예외가 아니라
사회 질서 내부에서 탄생한 균열의 표식이었다.그들이 선 무대는
- 여성의 부재가 만들어낸 공백,
- 그 공백을 채운 국가의 기획,
- 그 기획에 따라 성별을 유동적으로 배치한 사례였다.
결국 사내기생은 조선 사회가 얼마나 정교하게 성 역할을 관리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관리의 틈에서 얼마나 많은 젠더 유연성이 실현되고 있었는지를 드러내는 인물이다.5. 사내기생은 퀴어였는가, 예술가였는가
사내기생은 단지 궁중에서 춤추고 노래한 이들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성별 규범을 넘나들고, 사회가 허용한 경계의 틈에서 예술을 수행한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존재는 현대의 언어로 해석하자면, ‘예술가’이기도 하고 ‘퀴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내기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단지 여성처럼 꾸민 남자일까? 아니면 조선 시대의 성소수자, 또는 퍼포먼스 아티스트였을까?단순한 ‘여장 남자’인가?
사내기생을 단순히 ‘여장을 한 남성’으로 해석하면
그들의 복합적 정체성과 역사적 역할을 지나치게 축소하는 것이다.
그들은 단순한 성 역할 흉내가 아니라,
국가가 인정한 성별 전환의 상징적 수행자였으며,
문화적으로는 매우 정교한 훈련을 받은 예술적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었다.이들의 화장과 복식은 단지 외양이 아니라,
젠더와 계급, 예술과 권위를 동시에 시각화하는 상징 언어였다.
한복의 색상과 문양, 분장의 농도와 위치, 움직임의 각도 하나까지
모두 국가와 장악원이 정한 코드에 따라 통제되었으며,
그 자체가 하나의 ‘퍼포먼스 언어’였다.‘퀴어’라는 개념으로 다시 보기
현대에서 '퀴어'는 성소수자에 한정되지 않는다.
더 넓게는, 기존의 성별·성적 규범을 흔들고 재정의하는 모든 존재와 행위를 포괄한다.이 기준에 따르면, 사내기생은 명백히 퀴어한 존재였다.
- 그들은 생물학적 성별과 사회적 성 역할이 일치하지 않았고
- 공적 공간에서 젠더의 경계를 넘나들며
- 성별 수행을 통해 관객과 사회에 새로운 성적 질서를 보여주었다
즉, 그들은 오늘날로 치면 논바이너리(Non-binary), 젠더 플루이드(Gender fluid), 드랙 아티스트(Drag Artist)의 요소를 모두 갖고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퀴어성이 ‘저항’의 형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체제에 순응하면서도, 동시에 체제의 모순을 드러내는 존재였다는 점에서
훨씬 더 복합적이고 역설적인 위치를 차지한다.예술가로서의 정체성 – 정재의 주역
사내기생은 단순히 ‘젠더의 경계를 넘은 존재’로만 보면 안 된다.
그들은 철저히 교육받은 전문 예인이었으며,
정재(呈才)라는 고급 궁중무용을 수행한 정식 퍼포머였다.정재는 왕의 권위와 국가의 안녕, 조선의 예술적 정수를 보여주는 무대였다.
그 중심에는 사내기생이 있었고,
그들의 춤은 단지 아름다움의 표현을 넘어서
정치적 상징성과 예술적 정점이 만나는 지점이었다.이처럼, 사내기생은 ‘퀴어한 성 수행자’이자
‘정재 예술의 핵심’이라는 이중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사내기생의 삶은 역할인가, 정체성인가?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사내기생은 그저 역할만 수행했을 뿐일까?
아니면 그 안에 진짜 정체성이 있었던 걸까?이 질문에 명확한 대답은 없지만,
확실한 건 그들의 행위가 단순한 연극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일부 사내기생은 무대 밖에서도 여성적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기록이 존재하고
- 그들의 복식과 생활 양식이 예술로만 치부될 수 없는 수준까지 내면화되어 있었다는 정황도 있다
- 궁중에서 은퇴한 후에도 여성 역할로 대우받은 이들이 있었다는 기록은
그들이 단순한 역할자(role player)가 아니라, 사회가 인정한 또 하나의 젠더 존재였음을 의미한다
즉, 사내기생은 역할과 정체성이 분리되지 않은 존재였다.
그들의 삶은 연기였지만, 그 연기가 곧 삶이었고 현실이었다.퀴어성과 예술성의 교차점
사내기생은 퀴어성과 예술성의 교차점에 존재했다.
이들은 조선 시대의 경직된 성 질서 안에서,
오히려 가장 유동적이고 다층적인 정체성을 실현한 인물이었다.예술적 정점에서 수행한 젠더 퍼포먼스,
사회적 금기를 넘나드는 성 역할,
그리고 체제 내부에서 허용된 유일한 젠더 전복의 장치.이 모든 것은 오늘날 우리가 ‘퀴어 역사’, ‘젠더 역사’, ‘예술 사회학’에서 반드시 되짚어야 할 요소들이다.
6. 사내기생이 보여주는 젠더 퍼포먼스의 의미
사내기생은 단지 남성 예인이 여성처럼 꾸며 궁중에서 춤을 춘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조선이라는 보수적이고 위계적인 유교 사회의 질서 안에서, 제도적으로 허용된 젠더 전복자였다.
사내기생이 보여준 젠더 퍼포먼스는 조선 사회의 젠더 질서를 뒤흔들며,
성별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해왔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젠더는 연기될 수 있는가?
사내기생은 ‘남성’이라는 신체를 가지고 있지만,
공적인 무대 위에서 ‘여성’이라는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훈련된 손끝, 조절된 발끝, 상징적 표정과 시선으로
성별의 기호를 시각적으로 구현해낸 퍼포머였다.이들의 무대는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사회가 이상적으로 규정한 ‘여성성’을 남성의 몸에 입힌 상징적 의례였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실은 단 하나,
성별은 단지 생물학적 특성으로만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
젠더는 연습되고, 반복되며, 공연될 수 있다는 점이다.현대 젠더 이론에서 주디스 버틀러가 강조한 “젠더의 수행성”은
이미 수백 년 전 조선의 궁중에서도 실현되고 있었던 셈이다.사내기생은 경계를 흔들었다
사내기생이 수행한 젠더 퍼포먼스는
기존의 성별 구분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흔들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전체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이들은 남성이면서 여성을 연기했으며,
성역할을 절대시하던 사회 안에서
‘이분법적 성별 체계’의 유연성을 몸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그들이 존재했기에 조선 사회는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정해진 성 역할도 상황과 목적에 따라 변형 가능하다는 사회적 무의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퍼포먼스가 말하는 것: ‘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사내기생의 젠더 퍼포먼스는 단지 시각적 놀이나 흥미로운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조선 시대의 젠더 질서, 권력 구조, 예술 관념을 동시에 드러내는 다층적 코드이다.- 그들이 여성성을 연기했다는 사실은
여성성이 연기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 - 그들이 제도적으로 길러졌다는 사실은
국가가 ‘성별 수행’을 설계하고 승인했다는 구조적 맥락을 보여준다. - 그들이 무대 위에서만 존재했다는 사실은
사회가 젠더 전복을 일정한 공간에서만 용인했음을 뜻한다.
이 모든 요소는 ‘성은 타고나는 것이며 바꿀 수 없다’는 전제를 뒤흔든다.
오히려, 사내기생의 퍼포먼스는
“성은 배치되고, 연습되며, 정치적 이유에 따라 연기될 수 있다”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잊히지 않아야 할 역사
사내기생의 존재는 오랜 시간 동안 역사에서 사라지거나 왜곡되어왔다.
여성성의 모방자라는 오해,
풍속을 문란케 했다는 폄하,
남성 사회의 기괴한 예외로 치부된 평가 등은
모두 젠더 수행에 대한 불편함을 반영한다.하지만 사내기생은
- 분명히 존재했고
- 체제 안에서 인정받았으며
- 성별 개념을 해체하고 확장했던
조선의 가장 급진적인 문화 코드 중 하나였다.
이제 우리는 그들을 단지 “이색적이고 흥미로운 과거”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성별, 젠더, 예술, 정치의 교차점에서 사내기생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읽어야 할 시점이다.7. 왜 우리는 그들을 성소수자의 단서로 봐야 하는가
역사는 항상 ‘정상’이라 여겨진 경로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가 진짜 이해해야 할 것은 그 경로에서 밀려나거나 지워진 존재들이다.
사내기생은 바로 그러한 존재였다.
그들은 조선의 제도 안에서 기능했지만,
정통 역사서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볼 때,
사내기생은 젠더 역사 속에서 반드시 복원되어야 할 상징적 인물이다.보이지 않았던 존재들, 사라진 게 아니라 지워진 것이다
사내기생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확실히 있었고, 제도 속에서 훈련되었으며, 궁중의 공식 무대에 섰다.
하지만 유교 윤리가 강화되면서 그 존재는 점점 '불편한 진실'이 되었고,
그 결과, 사료에서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 강화
- 남성 중심 정통 사관의 집대성
- 풍속 교정이라는 명목의 검열
이러한 흐름 속에서 사내기생은
기록되지 않은 채 ‘없는 사람’이 되어갔다.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들은 지워졌는가? 그 지움은 무엇을 말해주는가?젠더 이분법 너머의 역사 쓰기
사내기생의 존재는
역사가 ‘남자 또는 여자’라는 이분법으로만 사람을 분류하고 기록해왔음을 폭로한다.
그들은 그 사이의 공간,
혹은 이분법 그 자체를 넘는 존재로서,
성별 구분의 역사적 허구성을 드러내는 강력한 사례다.오늘날 성소수자와 젠더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고 있는 지금,
사내기생을 역사 속에서 복원하는 일은 단지 과거를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
현재를 더 깊이 이해하고 미래를 그리는 시도이기도 하다.지금-여기의 젠더와 연결되다
현대의 젠더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는
성별이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인식이다.
사내기생은 이 인식을 수백 년 전에 몸으로 실현한 존재였다.- 그들은 정해진 젠더를 넘나들었고
- 예술이라는 통로로 성 역할을 다시 구성했으며
- 제도 안에서 ‘또 다른 젠더의 가능성’을 열었다
이런 점에서 사내기생은
단지 조선시대의 문화사적 인물이 아니라,
젠더 다양성의 역사를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조각이다.사내기생을 다시 쓰는 일, 역사 복원의 시작
우리가 사내기생을 다시 조명하는 일은
‘퀴어한 과거’를 발굴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단순히 옛 기록을 보완하는 작업이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존재를 역사 속에 다시 자리잡게 하는 정의로운 복원이다.- 이제까지의 역사 쓰기가 배제했던 존재들
- 사회가 의도적으로 침묵했던 인물들
-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지워진 목소리들
사내기생은 그 대표적 사례이며,
이들을 다시 쓰는 일은
이분법적 사유에서 다원적 사고로의 전환을 상징한다.왜 지금, 사내기생인가?
오늘날 우리는 젠더, 다양성, 정체성에 대한 논의를 활발히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논의가 깊이를 가지기 위해서는,
역사 속에서 이미 존재했던 다양한 성별 수행의 사례들을 이해하고 복원하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사내기생은 그 점에서,
현대 젠더 논의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존재다.
우리는 이제 그들을 ‘예외’가 아니라
한 사회가 만들어낸 복합적 정체성의 증거로서 바라보아야 한다.8. 오늘날 퀴어 문화와 역사적 연속성
현대 퀴어 문화는 전통과 단절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내기생 같은 존재는
한국 전통 안에도 젠더 유연성이 있었다는 역사적 연속성을 가능케 한다.국악, 전통무용, 연희 등에서
사내기생의 퍼포먼스는 종종 ‘특이한 사례’로 간주되지만,
이제는 그들을 통해
전통 안에 내재된 젠더 다양성과
조선의 퀴어적 상상력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9. 사내기생을 통해 다시 쓰는 성의 역사
사내기생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기록되지 않았고, 말해지지 않았으며, 기억되지 않았을 뿐이다.이제 우리는 그들을 통해
조선의 성문화, 젠더 질서, 예술과 정체성의 관계를
새롭게 들여다보아야 한다.그들의 존재는 단순한 기이한 사례가 아닌,
조선이 가졌던 또 다른 얼굴이며,
오늘날 성소수자 문화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귀중한 단서이다.'조선 시대 ‘사내기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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