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야의 조선시대 '사내기생'

조선 시대 ‘사내기생’

  • 2025. 6. 9.

    by. 유니야15

    목차

      1. 실록이란 무엇인가 – 조선의 기록문화 이해

      조선왕조실록은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다. 그것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자신의 국가 운영, 통치 방식, 그리고 시대정신을 공식적으로 남긴 기록의 집합체이다. 총 25대 왕의 치세를 다룬 방대한 분량의 이 기록은, 오늘날에도 동아시아 역사연구에서 가장 신뢰받는 1차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1) 실록의 편찬 목적: 정치의 기록, 왕의 거울

      실록(實錄)은 문자 그대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조선은 유교 이념을 기반으로 한 통치국가로, 왕의 통치는 항상 도덕성과 정당성을 근거로 정당화되어야 했다. 실록의 목적은 바로 그 통치의 정당성을 후대에 설명하고, 군주가 자신의 거울로 삼아야 할 역사적 교훈을 남기는 것이었다.

      즉, 실록은 단지 과거를 나열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교과서였고, 군주의 행동 지침서였다. 이 때문에 실록은 조선 왕의 탄생부터 죽음까지를 하루도 빠짐없이, 날씨와 일기까지 포함해 꼼꼼히 기록했다.

      2) 실록의 편찬 방식: 사관의 침묵, 정리의 철칙

      실록은 **사관(史官)**이라 불리는 관료들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들은 왕이 발언하거나 행동하는 순간마다 곁에서 조용히 기록했다. 놀라운 것은, 왕이라 해도 이 기록을 열람하거나 수정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기록의 중립성과 진실성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편찬은 대개 왕이 승하한 후, 해당 왕의 재임 기록을 바탕으로 집필되었다. 수많은 원자료(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를 분석하고, 실제 사건을 비교하여 정제된 서술체로 완성한 것이 실록이다. 따라서 실록은 의도된 기록물이지만, 다른 사료와 교차 비교했을 때 조선 사회의 정치적 온도와 흐름을 감지할 수 있는 정밀한 도구가 된다.

      3) 기록의 성격: 정치 중심, 위계 중심, 유교 중심

      그러나 이 실록은 매우 철저하게 ‘정치 중심적 사고’에 기반한 기록이다. 주인공은 언제나 왕이며, 그와 직결된 대신, 관료, 외교관들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음악가, 무용수, 기생 등 예술을 담당한 인물들은 거의 언급되지 않거나 이름 없이 처리된다.

      또한 실록은 남성 중심, 권력 중심의 기록이다. 여성은 왕비, 후궁, 세자빈 등 권력과 결부된 위치에 있을 때만 이름이 기록된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의 처’, ‘궁녀’, ‘기생’ 등의 일반적 표현으로 뭉뚱그려진다. 이 같은 편향은 오늘날 ‘공식 역사’가 누구를 포함하고 누구를 배제하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사례다.

      4) 문화와 예술은 왜 부차적으로 취급되었는가

      실록에는 수많은 궁중연회, 외국 사신 접대, 왕의 연희 기록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 무대에서 춤추고 노래한 사내기생이나 장악원 예인들의 이름은 없다. 오직 "연회가 성대히 열렸다", "기생이 무대를 꾸몄다"라는 방식으로 표현될 뿐이다.

      이는 문화예술을 실현한 주체들이 권력적 인식에서 배제되었음을 상징한다. 무대는 기록되되, 그 무대 위 인물들은 기록되지 않은 것이다. 사내기생을 비롯한 수많은 예인들은 조선을 장식했지만, 조선의 기록에서는 ‘이름 없는 기능자’로 존재했다.

      정리하자면

      • 실록은 정치적 통치성과 도덕적 정당성을 남기기 위한 기록이다.
      • 실록의 기록 대상은 권력을 가진 자 중심이며, 여성과 예인은 대체로 배제되었다.
      • 조선왕조실록은 정밀하고 방대한 사료이지만, 문화예술과 주변 인물의 역사에는 공백을 가진 기록물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우리는 실록의 빈틈을 주목해야 한다. 이름 없이 사라진 인물들, 기록되지 않았지만 무대를 만들고 나라의 문화를 지탱했던 존재들을 기억하는 일은, 단지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의 권리를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2. 사내기생은 실록에 어떻게 등장했나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내기생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존재는 매우 간접적이고 희미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이름이 언급되는 경우는 드물고, 대부분은 직함 또는 기능 중심으로 서술된다. 예를 들어 ‘기생이 정재를 추었다’, ‘장악원에서 사람을 불러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는 식이다. 이처럼 개인의 정체성은 지워진 채, 역할만 남은 기록은 사내기생이라는 독특한 존재가 실록 속에서 어떻게 다뤄졌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1) 실록 속 표현: 무명 인물, 기능 중심

      실록에 등장하는 사내기생 관련 표현은 대개 다음과 같은 양상을 띤다.

      • “○○에 명하여 정재를 추게 하였다”
      • “기생이 연주를 맡았다”
      • “장악원 악인들을 불러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이러한 표현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내기생이 공식 국가의례의 중요한 구성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개인이 아닌 집단적 기능 단위로 다뤄졌다는 점이다. 그들의 춤, 연주, 참여 자체는 기록되었지만, 누가 어떻게 그 예술을 수행했는지는 남지 않았다.

      2) 남성 기생이라는 단어의 부재

      실제로 ‘사내기생’이라는 단어 자체는 실록에서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기생’이라는 용어가 기본적으로 여성에게 귀속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남성 예인들이 여장을 하고 여성 역할을 수행했을 경우에도 실록에서는 굳이 그 젠더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 그냥 ‘기생’ 또는 ‘악공’, ‘무희’ 등의 표현으로 처리한다. 이는 젠더의 경계에 있는 존재를 역사적 기록에서 어떻게 모호하게 처리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예를 들어, 어떤 궁중연회에서 남성 예인이 여성처럼 춤을 추었다 해도, 실록은 단지 “기생이 정재를 추었다”고만 기록한다. 그 기생이 여성인지 남성인지에 대한 정보는 사라진다.

      3) '정재'라는 틀 속의 익명성

      정재(呈才)는 조선의 공식 궁중무용이다. 외국 사신을 접대하거나 왕실 의례를 진행할 때 반드시 포함되는 공연이었으며, 사내기생은 이 정재의 주 무대에 섰던 핵심 인력이다. 하지만 실록에서 정재는 ‘누가’가 아닌 ‘무엇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예시:

      • “사신 접대에 정재로는 무고(舞鼓), 처용무(處容舞)를 올렸다.”
      • “○○에서 기생들이 춤을 추었다.”

      이렇듯, 정재는 공연의 제목과 형태만 기록되고, 그것을 수행한 예인의 정체성은 생략된다. 이는 예술의 무대를 빌려 정치적 정당성과 국가의 위엄을 연출하고자 했던 조선의 의도를 반영한다. 즉, 퍼포먼스는 국가의 것이되, 예인은 단지 소모적 수행자로 기능할 뿐이었다.

      4) 예외적 기록: 아주 드물게 남은 개인

      사내기생에 대해 실명이 남은 기록은 실록이 아닌 의궤나 승정원일기 같은 기록에서 간혹 발견된다. 예를 들어 장악원 예인 중에서 재주가 뛰어나거나, 사건에 연루된 인물은 간단한 이름이나 별칭으로 언급된 사례가 있다. 하지만 실록 내에서는 이런 예외는 극히 드물다.

      그렇기에 실록만으로는 사내기생의 삶과 활동을 온전히 복원할 수 없다. 다양한 보조 자료와 후속 기록, 시각예술, 복식 연구를 종합적으로 분석해야만 그들의 삶을 조금씩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결론

      사내기생은 실록 속에 ‘존재는 했으나, 이름은 없던’ 인물이었다. 그들의 기록 방식은 존재의 부정이 아니라, 정체성의 삭제였다. 실록은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말하지만, 누구였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이런 기록 방식은 단지 역사적 무관심이 아니라, 조선의 젠더 이데올로기와 권력 구조가 작동한 결과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실록이라는 기록의 틈을 읽어야 한다. 이름은 없지만, 무대를 만들고 문화를 지탱했던 이들의 흔적은 여전히 곳곳에 남아 있으며, 그들의 흔적을 찾아내고 복원하는 일이야말로 진짜 역사를 완성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사내기생, 왜 이름은 실록에 남지 않았을까?

      3. 이름이 아닌 직함으로만 기록된 이유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공식 기록에서 사내기생은 거의 대부분 실명이 아닌 직함 또는 직능 중심으로만 등장한다. 이는 단순히 기록자의 실수나 무지 때문이 아니라, 조선의 기록문화, 신분제도, 그리고 유교적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다. ‘누구’보다 ‘무엇’이 중요한 체제 아래에서, 이름은 권력과 연결된 자에게만 부여된 특권이었다. 사내기생이 이름 대신 ‘기생’, ‘무희’, ‘악공’ 등의 명칭으로만 남은 이유는 그들이 속한 사회적 위치와 젠더적 경계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배제였다.

      1) 조선의 기록 구조: 권력 중심의 명명 방식

      조선 실록은 엄격한 신분 질서에 따라 이름의 기록을 달리했다. 국왕, 왕세자, 대신, 사헌부 관원, 유학자 등 지배계층의 남성은 실명으로 기록되었지만, 여성과 하층민, 예인은 대개 익명 혹은 직능 중심으로 서술되었다. 이는 기록의 대상이 곧 기록의 가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사내기생은 장악원이라는 국가 기관에 소속되어 있었고, 공식 의례에 참여한 인력이지만, ‘정치적 권력’과는 거리가 먼 존재였다. 따라서 실록에서 이들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기생’, ‘장악원 악공’, ‘무희’, ‘연주자’ 등으로 대체한 것은 당시 기록자들이 그들을 인격체가 아닌 기능 수행자로 바라봤음을 뜻한다.

      2) 유교적 명분과 이름의 경계

      조선은 유교 국가였으며, 유교는 철저히 이름의 권위를 중시하는 철학이었다. 성명은 단순한 지칭이 아니라 도덕적 지위와 위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실록에서 이름을 기록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존재를 공식화하고, 후대에 길이 남긴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사내기생은 유교적 시선에서 보면 불편한 존재였다. 남성이면서 여성처럼 행동하고, 무대에서 감정을 연기하며 성 역할을 전복하는 그들은 ‘이상한 존재’로 인식되었고, 그들의 이름을 남기는 행위는 기록자에게 도덕적 혼란을 줄 수 있는 문제적 행위였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직함으로만 남게 된 것이다.

      3) 예술 노동자는 왜 이름을 잃는가?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왜 예술가들은 이름 없이 기록되는가? 이는 비단 조선만의 문제가 아니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많은 사회에서 예술가는 왕을 위한 장식, 국가를 위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사내기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국가 의례의 장면, 왕의 기쁨, 사신 접대의 장식물로만 기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내기생들은 실제보다 상징적인 존재로 소비되었다. 그들의 역할은 실존했지만, 개인의 이야기는 ‘무대 뒤’로 밀려났다. 이것이 예술 노동자의 역사에서 반복되어 온 침묵의 패턴이다.

      4) 기록되지 않음은 존재하지 않음인가?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의 존재가 사회 질서 속에서 통제되고 억눌렸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사내기생은 분명히 존재했고, 활발히 활동했으며, 조선 궁중문화의 정수를 만들어낸 주역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름 없이 존재해야 했다. 기록은 존재를 구성하는 힘이기도 하기에, 이름이 지워졌다는 것은 곧 ‘주체로서의 권리를 부여받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직함에 가려진 이름을 복원하는 일

      ‘기생’, ‘무희’, ‘악공’이라는 단어는 역할을 지칭할 뿐, 한 사람의 생애와 개성을 담지 못한다. 그 이름들 뒤에는 개개인의 꿈과 노력이 있었고, 수십 년의 수련과 연습이 있었으며, 때로는 예술로 존재를 증명하고자 한 몸짓이 있었다.

      그 이름들을 복원하고, 직함 뒤에 숨겨진 사람의 흔적을 찾아내는 일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그것은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다시 쓰는 행위이며, 지금의 우리에게 그들의 문화적 유산과 젠더 정치학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실마리다.

      4. 유교 윤리와 기록 주체의 한계

      조선의 공식 기록물인 실록은 철저하게 유교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통치철학과 사회규범, 그리고 인간의 행동을 해석하는 방식 전체를 규정하는 이념이었다. 유교는 무엇이 기록되어야 하고, 어떤 행동이 모범이 되며, 누가 기억될 가치가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사내기생이라는 존재는 이 **기록 체계의 ‘경계 바깥’**에 있었으며, 존재했지만 완전히 드러나지 못했다.

      1) 유교 사회의 이상적 인간상: 군자, 남성, 권력자

      유교 사회에서 인간은 정해진 틀 속에서 살아야 도덕적이라 평가받았다. 남성은 남성다워야 했고, 여성은 여성다워야 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며, 자신의 역할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 ‘군자’의 길이었다.

      사내기생은 이 틀에 맞지 않았다. 그들은 남성이면서 여성의 역할을 연기했고, 감정과 예술을 매개로 세상과 소통했으며, 무대 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퍼포먼스’로 표현했다. 이는 유교적 가치관에서 볼 때 혼란스럽고 위험한 존재였다. 그래서 기록자들은 그들을 명확히 이름붙이기보다, 모호하게 처리하거나 회피하는 방식을 택했다.

      2) 실록 기록자들 역시 체제의 일부였다

      실록은 마치 중립적인 사실의 나열처럼 보이지만, 기록자 또한 사회 체제의 구성원이자, 이념적 인간이었다. 조선의 사관(史官)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교육받은 지식인이었고, 유교적 질서에 충실할 것을 요구받았다.

      따라서 사내기생 같은 존재는 기록자들의 관점에서는 **‘있지만 없어야 할 존재’**였다. 기록자들은 자신의 도덕적 위신과 사회적 역할에 따라 의도적으로 이름을 생략하거나, 해당 인물을 기능 중심으로만 묘사했다. 기록자의 윤리와 체제의 요구가 맞물려, 사내기생은 무대에 있었지만 기록에서는 사라지는 모순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3) 도덕적 불편함의 회피 – 말하지 않음이라는 전략

      조선은 유교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았고, 실록은 그 유교적 질서를 보존하고 강화하기 위한 도구였다. 유교의 관점에서 성의 모호성, 젠더의 유동성은 ‘도덕적 불편함’의 대상이었다. 이는 단지 기록에서 배제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논의조차 하지 않음으로써 존재 자체를 흐리려는 의도로 이어졌다.

      기록자들은 사내기생의 존재를 ‘말하지 않음’으로써, 체제를 흔들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했다. 이는 오늘날 젠더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가 미디어나 문서에서 배제되는 구조와도 닮아 있다. 보이지 않게 만들면,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조선이라는 사회적 문법의 한계

      결국 실록 속에서 사내기생이 지워진 이유는 단지 그들의 신분이 낮아서가 아니라, 조선 사회 전체가 그들을 수용할 언어와 문법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분적으로도, 성적으로도, 직업적으로도 경계에 있었다. 권력자의 서사 중심으로 짜인 실록이라는 구조 안에서는 이 경계적 존재가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이처럼 유교 윤리는 존재의 도덕성과 사회적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고, 기록자는 이 윤리를 반영하여 존재를 선별적으로 남겼다. 그 결과, 사내기생은 현실에는 있었지만 역사에는 없어진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윤리는 기록의 경계를 만든다

      기록은 언제나 가치판단의 산물이다. 조선 실록도 예외는 아니다. 누가 이름을 얻고, 누가 기능으로만 남는가. 누가 기록의 중심에 서고, 누가 주변에 머무는가. 이는 모두 윤리와 권력, 그리고 기록자의 선택에 따라 달라진다.

      사내기생은 이러한 경계선에 선 존재였다. 그들은 유교 윤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유로운 존재였고, 그래서 실록은 그들을 담아내지 못했다. 기록의 경계를 해체하고, 사라진 인물의 목소리를 되살리는 일은 이제 현대의 우리에게 맡겨진 숙제이다.

      5. 젠더 권력과 사내기생의 위치

      조선 시대의 사내기생은 궁중 의례의 중심에 있었고, 국가를 대표하는 공연의 최전선에 섰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왕과 사신, 귀족과 백성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조선 문화의 정수를 표현했다. 그러나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던 이들이, 정작 공식 역사 기록에서는 철저히 침묵당한 존재가 되었다는 점은 뼈아픈 문화적 아이러니다.

      무대 위에서의 찬란함과 역사 속의 공백, 이 두 현실이 보여주는 괴리는 단지 기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곧 조선이라는 사회가 ‘문화 예술’을 어떻게 소비하고, ‘예술가의 존재’를 어디까지 인정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1) 국가의 얼굴이었지만, 주체는 아니었다

      사내기생이 공연한 정재(呈才)는 단순한 춤이 아닌 국가의 체면을 세우는 의식 행위였다. 외국 사신이 왔을 때, 왕이 연회를 베풀 때, 중요한 국사(國事)가 있을 때마다 정재는 빠짐없이 포함되었고, 사내기생은 그 퍼포먼스의 중심에서 예술적 완성도를 책임졌다.

      하지만 국가가 그들의 몸을 빌려 권위를 세우고도, 그 개인에게는 이름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국가의 얼굴’은 되었으나, ‘역사의 주체’는 되지 못했다. 이는 단지 예술가의 지위가 낮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의 정체성과 역할이 당시 질서에 의해 설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2) 문화는 남고, 사람은 사라졌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조선의 정재를 계승한 무용, 음악, 복식, 의례를 문화재로 보존하고 계승하고 있다. <처용무>, <포구락>, <가인전목단> 같은 궁중 무용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될 정도로 높이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 예술을 실현했던 사람들의 이름과 생애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정재는 이어졌지만, 사내기생은 사라졌다. 예술은 기억되었지만, 예인은 잊혔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문화의 역설이다. 문화는 예술가를 통해 살아 움직이지만, 그 예술가는 종종 역사 속 그림자로 사라진다.

      3) 문화 소비 사회에서 ‘기록되지 않은 노동자들’

      사내기생은 조선의 문화예술 노동자였다. 고된 훈련을 거쳐야 했고, 장악원의 엄격한 체계 아래에서 예능을 연마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동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소비되었을 뿐, 노동의 가치로 기록되지 않았다.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문제다. 현대의 전통 예능 계승자들도 여전히 사회적 인식과 처우의 문제 속에 놓여 있다. 이름 없는 수많은 무대 뒤 조력자들, 안무가, 연주자, 연습생들은 사내기생처럼 무대를 빛내지만, 기록에는 남지 못하는 존재다. 조선의 사내기생은 단지 과거의 존재가 아니라, 오늘날 문화노동자의 역사적 뿌리로서 다시 읽혀야 한다.

      4) 역사적 침묵을 깨는 일, 기억의 복원

      이제 우리는 ‘그때 그 무대에 누가 있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춤을 춘 사람이 누구였는가, 음악을 연주한 이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이름 없는 예술가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행위 자체가 기록의 침묵을 깨는 시작이다.

      조선 실록은 그들의 이름을 지우려 했지만, 풍속화와 의궤, 민속무용과 구술 기록 등 다른 형태의 문화는 그 흔적을 조용히 간직하고 있다. 현대 연구자와 예술가, 그리고 문화 소비자 모두가 이 잊힌 인물들을 복원하는 데 함께해야 한다.

      무대는 남았고, 이제 우리는 ‘그들’을 찾아야 한다

      조선의 사내기생은 분명히 존재했고, 왕을 위해 춤췄으며, 문화유산을 남겼다. 하지만 그 이름은 사라졌고, 역사는 침묵했다. 무대는 남았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무대 위에 있었던 이들의 존재를 다시 호명하는 일이다.

      이름 없이 빛났던 이들의 삶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역사를 복원하는 첫걸음이 된다.

      6. ‘이름 없는 존재’가 된 예술가들

      조선왕조실록은 국가의 공식 기록이자, 당시 지배 권력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반영하는 ‘선택된 기억’의 집합이다. 하지만 그 기록 속에는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들의 이름이 없다. 사내기생은 그중 하나다. 궁중의례에서 춤추고, 연주하고, 왕과 사신 앞에서 예술을 실현했던 이들은 실존했지만, 실명은 지워졌다. 실록이 말하지 않은 그 이름들, 그 역할들, 그 존재의 깊이를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되묻고, 다시 써야 한다.

      1) 기록이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없다고 해서 사내기생이 실제로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들이 너무나도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에, 오히려 ‘불편한 존재’로 분류되어 기록에서 배제된 것이다. 그들의 예술은 남아 있고, 무용의 계보는 이어졌으며, 정재는 여전히 복원되어 공연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것을 창조하고 실현했던 개개인의 흔적은 의도적으로 가려졌고, 망각 속으로 던져졌다.

      2) 실록이 ‘국가 중심’ 서사라면, 우리는 ‘사람 중심’ 서사를 써야 한다

      실록은 임금과 관료 중심의 서사다. 그들이 언제 무슨 말을 했고, 어떤 결정을 내렸으며, 어떤 사건에 어떻게 대응했는지가 중심이다. 그 기록에서 사내기생은 단지 ‘의식의 일부’, ‘장면의 배경’에 불과했다. 이름 없는 기능으로만 존재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그 기록 너머의 사람들이다. 실록은 국가의 말이었지만, 우리는 민중의 말, 이름 없는 예술가의 말, 잊힌 이들의 말을 복원할 수 있다. 사내기생은 단지 춤을 춘 남자가 아니라, 문화의 전달자였고, 시대의 경계를 넘나든 젠더 수행자였으며, 궁중의 정체성을 무대 위에서 표현한 상징적 존재였다.

      3) 실록의 빈칸을 채우는 우리의 역할

      오늘날의 사학자, 예술가, 연구자, 그리고 대중들은 더 이상 실록이 기록하지 않은 것을 ‘없었던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공백 자체가 중요한 단서이며, 그 빈틈을 통해 잊힌 사람들의 존재를 상상하고, 재구성할 수 있게 된다.

      풍속화 속 정체불명의 인물, 의궤 속 무용 구성도, 전해 내려오는 구전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 이 모든 것이 바로 사내기생이 **‘살았던 흔적’**이다. 기록은 침묵했지만, 문화는 그들을 잊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그 문화의 조각들을 모아, 실록의 빈 페이지에 그들의 이야기를 채워 넣어야 한다.

      4) 침묵의 시대가 끝나려면

      역사는 더 이상 왕과 장수, 관료와 사대부만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름 없는 예술가, 여성, 하층민, 성소수자에게도 돌아가야 한다. 사내기생은 그 역사의 가장자리에 있었지만, 무대 한가운데에서 조선 문화를 표현했던 이들이다. 그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역사 쓰기다.

      이제 우리는 실록이 말하지 않은 사내기생의 이름을 부르고, 그들이 살았던 삶의 방식과 사회의 시선을 되짚으며, 기억에서 지워진 존재들을 복원하는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과거를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한 책임 있는 기록이다.

      7. 실록 밖에서 그들을 찾아야 하는 이유

      조선왕조실록은 분명히 정제되고 권위 있는 역사 기록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실록은 그 시대의 권력이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선택적 역사'일 뿐, 당대의 모든 존재와 목소리를 담은 총체적 기록은 아니다. 사내기생처럼 이름 없이 지워진 인물들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실록이라는 ‘공식’의 울타리를 넘어서야 한다. 실록 밖, 그 빈 공간에서야말로 사내기생은 비로소 진짜 인간으로 되살아난다.

      1) 실록은 권력의 언어로 쓰였다

      실록은 ‘임금의 거울’이었다. 왕이 어떤 판단을 내렸고, 어떤 신하가 충언을 했으며, 어떤 정책이 시행되었는지를 후대에 남기는 데 목적이 있었다. 자연히 실록에는 왕과 대신, 고위 관료, 그리고 공식적인 국가의 시스템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들만이 주요하게 다뤄진다.

      하지만 사내기생은 궁중에서 정재를 추며 핵심적인 문화 기능을 수행했음에도, 그들의 이름과 사적인 서사는 권력의 언어에 걸맞지 않다는 이유로 배제되었다. 무대 위에 존재했으나, 문서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 그들의 진짜 모습을 만나기 위해서는 권력 중심 서사에서 벗어나, 민속과 생활사의 틈을 살펴야 한다.

      2) 실록 밖의 기록, 의궤와 풍속화의 가치

      의궤(儀軌)는 왕실의 행사 절차와 의전을 상세히 기록한 문서다. 여기에 정재를 추는 사람들의 배치와 복장, 동선, 음악 구성이 나와 있다. 비록 이름은 없지만, 사내기생의 활동은 의궤 속 ‘움직이는 사람’으로 살아 숨쉰다. 또한, 신윤복·김홍도 등 풍속화가들의 그림에서도 여성처럼 보이는 남성의 몸짓이나, 춤을 추는 남성 무희의 모습이 포착된다. 이는 실록이 말하지 못한 사내기생의 흔적을 비공식 시선 속에서 복원할 수 있는 귀중한 단서다.

      특히 풍속화는 시대의 현실과 욕망, 민중의 시선을 담고 있기에, 실록이 외면한 존재들의 그림자와 기호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실록은 '보여줄 것'만 남겼다면, 풍속화는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림 속에 숨겼다.

      3) 구술, 민속, 무형문화 속에 살아 있는 그들

      사내기생의 존재는 실록이라는 문서에는 없지만, 구술 전통과 민속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지역 예능 전승자들의 이야기, 전통 공연을 계승하는 명무(名舞)들의 구술, 장악원 관련 비전 자료, 종묘제례악과 같은 무형문화 속 의례 전통에도 그 흔적이 숨어 있다.

      또한 오늘날 전통예술을 복원하고 재해석하는 창작 무용가, 국악인들 역시 사내기생의 존재에 주목하며, 그 잊힌 예술가의 정신을 무대 위에서 다시 구현하려 한다. 실록이 아닌 무형의 기억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그들을 더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4)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복원이 아니라 '상상과 윤리의 실천'

      사내기생을 실록에서 찾을 수 없다면, 우리는 그들을 ‘상상’해야 한다. 단, 그 상상은 망상이 아니라 윤리에 기반한 역사적 상상력이다. 이는 ‘허구’가 아니라 ‘복원’이다. 복원이란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사라진 자리를 직면하고,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한 책임 있는 서사를 만드는 일이다.

      그들이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춤을 추었으며, 무대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를 생각해보는 행위 자체가, 이미 역사 복원의 첫 걸음이다.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침묵 속에 존재한 자들을 다시 호명하는 것은 역사를 대하는 윤리적 자세이자, 우리가 미래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진짜 역사는 실록 밖에서 다시 태어난다

      사내기생은 실록 안에는 없지만, 조선 문화의 뼈대 한 자리를 분명히 차지했던 존재다. 무대에서 정재를 춘 그들의 몸짓, 음악을 연주한 손끝, 퍼포먼스를 준비한 땀방울은 실록이 말하지 않았을 뿐, 분명히 있었다.

      그러니 진짜 역사는 실록 밖에서 태어난다. 공식 기록이 침묵한 곳에서, 우리는 말해야 한다. 문화 속에 스민 기억, 전승된 기술, 복원된 예술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되살릴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지워진 역사를 회복하고, 우리 시대의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