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야의 조선시대 '사내기생'

조선 시대 ‘사내기생’

  • 2025. 6. 7.

    by. 유니야15

    목차

      1. 조선왕조실록이란 무엇인가 – 기록의 구조와 성격

      조선왕조실록은 단순한 연대기적 역사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조선 왕조가 남긴 가장 방대한 공식 역사서이자, 국가 운영의 전 과정을 집대성한 정치·문화 기록물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의 즉위에서부터 1863년 철종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무려 472년간의 국정을 빠짐없이 기록한 이 실록은 오늘날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역사적 가치뿐 아니라 기록의 형식과 철학 자체로도 주목받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가장 큰 특징은 하루 단위로 왕의 언행과 국정 상황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매일매일 국정 일기를 쓴 것과 다름없다. 작성은 사관(史官)이라 불리는 전문 기록자들이 맡았으며, 이들은 회의석상이나 공식 행사에 참석해 왕과 신하의 발언을 빠짐없이 적어 내려갔다. 사관은 절대 중립적인 위치를 유지해야 했기에, 당시 왕도 사관 앞에서는 말을 조심해야 할 정도였다. 그만큼 조선은 권력자조차 감시의 대상으로 삼는 기록주의적 문화를 가진 나라였다.

      하지만 이처럼 정밀한 기록이 모든 것을 남겼던 것은 아니다. 실록은 왕과 고위관료 중심의 국가 운영 일지를 우선시했기에, 하층민, 여성, 예술 노동자 등의 존재는 매우 제한적으로 등장한다. 특히 젠더 역할을 벗어난 인물들, 가령 남성이 여성성을 표현하거나 고정된 성 역할을 넘나드는 경우는 의도적으로 누락되거나 모호하게 표현되는 일이 많았다. 바로 사내기생이 여기에 해당한다.

      실록은 크게 세 단계의 구조로 만들어졌다.
      첫째, **사초(史草)**라는 ‘날것의 기록’이 있었다. 이는 사관이 당일 있었던 일들을 자유롭게 메모한 것이다. 사초는 왕조차 볼 수 없었으며, 사관 사후 폐기되었다.
      둘째, 이를 바탕으로 만든 **시정기(時政記)**는 각 부서와 관청의 공식 문서를 종합해 편찬한 공식적 자료였다.
      셋째, 이 두 가지를 기반으로 최종 완성된 것이 우리가 아는 조선왕조실록이다. 여기엔 왕의 치세를 중심으로 한 정치 사건, 외교, 군사, 농업, 과학, 문화 등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흥미로운 점은, 실록은 왕이 사망한 후에 편찬되었으며, 그 내용은 어떤 경우에도 수정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기록은 신중하고 객관적이려 노력했지만, 동시에 왕실의 명예를 고려해 민감하거나 논란이 되는 사안은 누락되거나 미화되기도 했다. 특히 남성의 여성화, 성 역할 유동성, 신분제의 모순을 드러내는 기록은 이러한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실록을 볼 때는 그 ‘기록된 것’뿐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읽는 시각이 필요하다.

      사내기생은 이러한 실록의 구조와 철학 속에서 존재했지만 실명 없이, 혹은 ‘악공’이나 ‘무동’ 등 기능 중심으로만 등장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나타난다. 그들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기록의 행간에 남은 표현들은 우리에게 조선이라는 시대의 문화와 젠더 구조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단서가 된다.

      따라서 실록은 단지 정치사의 보고가 아니라, 누락된 존재들을 복원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사내기생을 포함한 하층 예인들을 실록 속에서 다시 읽는 일은, 우리 사회가 잊고 있었던 다른 목소리, 다른 몸짓, 다른 정체성을 다시 발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2. 실록 속 ‘사내기생’ 등장 기록 분석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내기생’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곧 사내기생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직접적 명시 없이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방식, 그리고 ‘지워진 존재’로서의 흔적이야말로 이들의 존재를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단서다.

      실록은 기본적으로 왕과 고위 관료, 중앙 정치 중심의 기록이다. 그 가운데 예술과 의례 관련 내용은 주로 왕실 행사나 외국 사신 접대, 왕세자 책봉, 혼례 등 중요한 국정 의례와 연계되어 기술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내기생의 그림자 같은 존재감이 드러난다.

      대표적인 표현은 다음과 같다:

      • “장악원 악공이 음악을 울리고 무동이 정재를 올렸다.”
      • “사신 접대에 정재를 배치하고, 무동 8인을 파견하였다.”
      • “궁중 진연에 무동이 춤을 추었으며, 왕이 기뻐하였다.”

      이처럼 실록에는 ‘사내기생’이라는 명칭 대신 **‘무동(舞童)’, ‘악공(樂工)’, ‘장악원 소속 예인’, 또는 단순히 ‘무용수’, ‘악사’**로 기술되어 있다. 이들 표현은 모두 남성을 지칭하면서도 예술적 기능을 맡은 인물들이다. 특히 ‘무동’은 사내기생을 가리키는 데 자주 등장하는 용어로, 남성 아이 또는 청년이 궁중 의례에서 춤을 추는 역할을 했음을 뜻한다.

      예를 들어, 영조 44년(1768년) 10월 17일자 실록에서는 왕실 진찬(進饌)을 위해 장악원에서 악공과 무동을 파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무동은 춤을 추기 위한 인력으로 언급되며, 실질적인 궁중 정재 수행자였다는 점이 드러난다. 또한 정조 대의 기록에서는 궁중 행사에서 '무동의 춤사위가 정숙하였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처럼 단순한 기능인력 이상의 예술성과 품격이 요구된 존재였다는 점이 실록 표현 속에서 드러난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기생’이라는 이름으로 남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기생이라는 단어 자체가 ‘여성 예인’을 전제로 했던 당시 사회 구조와 맞물린다. 조선은 엄격한 유교적 성 역할 구분 속에서, 남성이 여성의 역할을 수행하거나 여성성을 표현하는 행위에 대해 명시적 언급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남성 기생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기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중립적인 기능적 명칭으로 우회한 것이다.

      또한, 실록에서 반복되는 공식적 언급 구조도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악공 몇 인, 무동 몇 인”처럼 개인의 이름 없이 숫자만 표기하는 방식이 관례로 자리 잡았다. 이는 곧 이들이 신분상 하층인으로 분류되었고, 역사적 주체로서 기록되지 못했음을 반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록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들이 조선 왕실 행사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예술 인력이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실록 속 등장 빈도 또한 꾸준하다. 태종에서 영조, 정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 궁중 연회나 의례에 악공과 무동이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다만 그 이름이 남지 않아, 개별 인물의 생애를 추적할 수 없는 한계가 있을 뿐이다.

      더 나아가, 일부 실록에서는 무동이 아닌 기생이라는 표현이 직접 사용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기생들이 궁중에 들어와 정재를 베풀었다”는 식의 기록은 장악원 소속 남성 예인을 지칭한 것일 가능성도 있다. 당시 여성 기생은 궁중 출입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궁중에서 장기간 상주하며 춤과 음악을 제공한 이들이 남성일 가능성이 크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실록 속 사내기생의 등장은 직접적이지 않지만, 기능적 묘사와 간접 표현을 통해 다층적으로 존재를 입증한다. 그들은 조선 궁중 문화의 주요 실천자였으나, 유교적 성윤리, 신분제, 기록의 정치성 속에서 이름을 빼앗긴 존재였다. 실록의 행간을 읽는 이 작업은, 단순한 과거 복원이 아니라 기억에서 지워진 주체를 다시 역사로 불러오는 문화적 복원이라 할 수 있다.

      실록에 기록된 사내기생 총정리 – 역사 속 숨은 주인공

      3. 등장한 기록은 어떤 표현으로 남았는가

      조선왕조실록은 놀라울 만큼 방대한 정보와 정밀한 표현을 담고 있지만, 기록의 언어는 선택적이고 정치적이다. 즉, 어떤 존재는 구체적 실명과 함께 남고, 어떤 존재는 존재했음에도 이름도 정체도 남지 않는다. 사내기생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들은 실록에 분명히 등장하지만, ‘사내기생’이라는 이름 대신 기능 중심, 숫자 중심, 우회적 표현으로 기술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표현은 다음과 같다.

      • “악공 ○인”
      • “무동 ○인”
      • “장악원 소속 예인”
      • “정재를 베풀었다”
      • “왕이 기뻐하였다”
      • “사신 접대에 음악과 춤이 펼쳐졌다”

      이 표현들은 언뜻 보면 단순한 행사 기술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사내기생의 존재가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다. 예컨대 ‘무동(舞童)’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어린 남성 무용수를 의미하며, 이는 여성 무용수와는 분명히 다른 젠더 정체성을 전제한다. 특히 궁중 무용인 ‘정재(呈才)’가 행해질 때, ‘무동’이 그 춤을 추었다는 언급은 남성이 여성 역할을 수행하며 춤을 췄음을 암시한다.

      또한 '악공'이라는 표현도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악공은 연주자라는 인식이 있지만, 조선 후기에는 음악과 무용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악공으로 시작해 무동으로 전향하거나, 악공이 특정 무대에서 춤을 함께 수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음악과 무용, 퍼포먼스를 수행한 남성 예술 노동자들이 실록에서 ‘악공’으로 호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록 방식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이름을 기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 “○인”처럼 인원 수로만 처리된다. 예: “악공 4인을 명하여 궁중에 들여보내 정재를 베풀게 하다.” 혹은 “무동 6인이 차례로 춤을 추자, 임금이 그 정숙함을 칭찬하다.” 이처럼 ‘무엇을 했는가’는 기록되지만, ‘누가 했는가’는 지워진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실록에 자주 ‘주어 없이 수동태’처럼 기록되었다. “정재가 열렸다”, “춤이 시작되었다”, “음악이 흐르다” 등 행위의 중심은 존재하지만, 그 주체는 말해지지 않는다. 이는 조선의 유교적 가치관에서 예술 노동자, 특히 성 역할을 넘나드는 존재에 대한 명시적 언급을 피하려 했던 태도와도 깊이 연결된다.

      그리고 간혹 ‘기생(妓生)’이라는 단어가 직접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영조 연간 실록에서는 “장악원 기생들이 무대에서 춤을 추었다”는 식의 기록이 확인된다. 이때 ‘기생’이 여성이라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오히려 궁중의 보수적 규율과 여성 기생의 출입 제한을 고려하면, ‘기생’이라는 표현은 남성 예인일 가능성도 있다. 즉, 사내기생이 ‘기생’이라는 호칭을 공유했을 수 있으며, 이는 후대에 생긴 혼동의 단서가 된다.

      요약하자면, 실록 속 사내기생은 다음 세 가지 방식으로 존재한다.

      1. 기능 중심의 표현: 무동, 악공, 정재 수행자
      2. 숫자 중심의 기록: ‘○인’ 형태로 집단화
      3. 간접 표현: ‘춤이 추어졌다’, ‘정재가 베풀어졌다’ 같은 주체 없는 표현

      이러한 기술 방식은 사내기생이 ‘조선의 공식 예술 시스템 안에 있었지만’, 신분, 성 역할, 젠더 이데올로기 등의 이유로 실명과 개별성은 지워졌음을 뜻한다.

      결국 이들은 기록에 ‘보이지 않게’ 등장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런 표현의 방식을 역으로 분석하면, 조선 왕실이 얼마나 사내기생의 존재에 의존했는지, 그리고 그들을 역사에서 얼마나 애써 감추려 했는지를 읽을 수 있다. 무대는 분명히 존재했고, 무용도 있었으며, 왕도 기뻐했다. 그 모든 장면에 등장한 이들은 단지 ‘이름을 잃었을 뿐’ 결코 없었던 존재가 아니었다.

      4. 어떤 사건에 사내기생이 언급되었는가

      사내기생은 조선시대의 일상 속 평범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들은 국가의 공식 의례와 중대한 궁중 행사에만 동원되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조선왕조실록』 속에서 사내기생(또는 그에 해당하는 ‘무동’, ‘악공’ 등)과 관련된 기록은 대부분 왕실 행사, 외교 의례, 왕의 연회, 세자 책봉, 혼례 등 국가적 중대사와 관련되어 나타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내기생이 조선의 문화 예술 구조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 외국 사신 접대 의례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사례 중 하나는 바로 중국, 일본, 유구 등에서 온 사신을 접대할 때의 기록이다. 이때 조선은 자국의 문화를 드러내기 위해 반드시 ‘정재(呈才)’를 베풀었고, 그 주체로 장악원 소속 무동과 악공들이 동원되었다.

      예:

      “○월 ○일, 명나라 사신 접대에 정재 5종을 올리고, 무동 ○인, 악공 ○인을 명하여 왕명에 따라 무대를 구성하게 하였다.”

      이러한 문장은 단순히 공연을 했다는 기록이 아니라, 사내기생이 국제 외교의 문화 대사 역할을 수행했음을 뜻한다. 궁중 무용은 단지 ‘공연’이 아닌, 국가 이미지를 대표하는 문화적 상징이었다.

       2) 왕실 연회와 진연

      ‘진연(進宴)’은 왕의 생일, 세자 탄생, 태후의 회갑 등 축하 연회를 의미한다. 이때도 정재와 음악 공연은 필수적이며, 대부분 장악원 예인들이 동원되었다. 사내기생은 이때 화려한 의상과 정교한 몸짓, 음악을 통해 무대를 채웠다.

      예:

      “정조 12년, 태후 진연에 무동들이 정재 ‘포구락’과 ‘무고’를 올리자, 왕이 이를 감상하며 기뻐하였다.”

      여기서 ‘포구락’이나 ‘무고’는 정통 궁중 무용이며, 당시 여성 출입이 제한된 궁중 환경상 남성 무희, 즉 사내기생이 이 공연의 주체였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3) 왕의 즉위 및 세자 책봉 의례

      즉위식이나 세자 책봉은 조선의 통치 정통성을 상징하는 의례다. 이때 정재는 단순한 축하가 아니라 왕권과 통치의 신성함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의식적 퍼포먼스였다. 사내기생은 이런 퍼포먼스의 주요 구성원으로 등장한다.

      예:

      “영조 즉위식 이후 대궐에서 열린 진찬에서 장악원 무동 ○인이 ‘춘앵전’을 올리다.”

      ‘춘앵전’은 본래 여성이 추는 무용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조선 후기 남성 예인이 자주 공연한 기록이 있다. 이는 사내기생이 단순한 무용 인력이 아닌, 여성적 정재를 구현한 전문 퍼포머였음을 보여준다.

      4) 왕의 사적인 감상 연회

      궁중 연회 중에서도 특별히 왕의 취향에 맞춘 소규모 연회나 비공식 연무도 실록에 드물게 등장한다. 이때 왕이 사내기생의 정숙하고 정교한 춤사위를 보고 칭찬하는 장면은 예술적 평가와 더불어, 이들의 존재가 단지 실무 인력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예:

      “숙종 19년, 왕이 장악원 예인들의 춤을 감상하며 ‘정재가 바르다’고 평하였다.”

      이러한 표현은 단순한 ‘공연’이 아닌, 예술적 완성도와 왕의 미적 감각을 충족시킨 존재로 사내기생이 인식되었음을 나타낸다.

      5) 정조의 규장각 문화 활동과 공연 기록

      정조는 예술과 학문을 중시한 군주로 유명하다. 그는 규장각을 세우고 다수의 문화 예술인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사내기생은 이 시기에 왕의 문화정책을 실현하는 실제 예술 집행자로 활약한다.

      예:

      “정조 17년, 창덕궁 후원에서 연행된 정재에 무동 6인과 악공 8인을 배치하다.”

      이 기록은 단순한 공연 명령이 아니라, 조선 후기 예술정책과 문화 활동에서 사내기생의 역할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동원되었는지를 보여준다.

      6) 의궤와 승정원일기에 보완된 사례들

      실록에 간접적으로만 등장한 사내기생은 의궤(儀軌)와 승정원일기 등 다른 사료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보완된다. 예를 들어, **『원행을묘정리의궤』**에서는 정조의 능행(陵行)에 동원된 장악원 예인들의 역할과 공연 장면이 시각적으로 그려져 있으며, 이는 실록에서 빠진 사내기생의 실질적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결론

      사내기생은 평범한 날이 아니라, 국가의 중요한 순간마다 등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없고, 오직 기능만 남았다. 실록은 이를 숫자로 기록하고, 의례로 포장했다. 이 모든 정재, 연회, 사신 접대의 무대 뒤에는 조선의 젠더 유연성과 예술 노동자의 그림자가 있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을 단순한 무용수로 보지 않고, 조선의 공적 문화 시스템을 떠받든 예술가이자 퍼포머, 그리고 기록되지 않은 역사의 주인공으로 재조명해야 한다.

      5. 장악원과 사내기생의 공식 명칭

      조선시대 궁중 음악과 무용을 총괄한 국가 기관은 바로 **장악원(掌樂院)**이었다. 장악원은 조선 초기부터 말기까지 존재한 왕실 전속 예술 기관으로, 주로 궁중 연회, 국가 제례, 외국 사신 접대 등에서 연주될 음악과 춤을 담당했다. 이곳에서 활동한 사람들 중에는 단순한 연주자나 음악가를 넘어 퍼포먼스를 완성하는 무용수들, 그 중에서도 사내기생으로 불리는 남성 예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혹은 기록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사용되었다.

      1) ‘악공(樂工)’ – 가장 널리 쓰인 범칭

      ‘악공’은 장악원 소속 인력 중 악기 연주자, 노래하는 사람, 무용수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명칭이다. 사내기생 또한 이 범주에 포함되었지만, 단순히 악기를 다루는 기술자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들의 예술성과 젠더 정체성은 공식 명칭에서는 가려지기 일쑤였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악공 몇 인이 궁중에 들어가 정재를 올렸다”는 표현은, 바로 이들을 가리키는 사례다.

      이처럼 사내기생은 공식적으로 '기생'이 아니라 ‘악공’이라는 명칭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이는 유교적 신분체계와 기록 윤리상 여성성과 예술성을 함께 드러내는 ‘기생’이라는 호칭을 남성에게 붙이는 것을 꺼린 결과다.

      2) ‘무동(舞童)’ – 어린 무용수 또는 젊은 남성 무희

      ‘무동’은 조선 실록과 의궤에서 자주 등장하는 명칭이며, 일반적으로는 궁중 무용을 담당한 어린 남성 무용수를 뜻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무동’이 단순한 나이 개념이 아니라, 궁중 예식에서 여성 역할을 수행하며 춤을 추는 남성을 암시하는 용어로 쓰였다는 점이다.

      무동이라는 표현은 특히 정재(呈才)라는 궁중 무용을 출 때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정재는 여성성이 강조된 무용이었으나, 궁중 내부에 여성 출입이 제한되던 시기, 이 역할을 남성 예인이 대체하며 무동이라는 이름으로 무대를 지켰다.

      예를 들어, “무동 6인을 명하여 포구락을 추게 하다”와 같은 기록은 사내기생의 실질적 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흔적이다. 이들 무동은 단지 춤을 춘 소년이 아니라, 젠더를 연기하며 국가의 시각적 상징을 구현한 존재였다.

      3) ‘기생’이라는 단어는 공식 명칭이었는가?

      현대의 시선으로 보면 사내기생이니까 ‘기생’이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했을 것 같지만, 실제로 ‘기생(妓生)’이라는 명칭은 장악원 남성 인력에게 공식적으로 부여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기생’은 기본적으로 여성 예인에 한정된 단어였으며, 사적인 연회 또는 접대 문화 속에서 활동한 여성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일부 예외적 상황에서는 궁중 공연의 주체가 ‘기생’이라 언급되는 기록도 존재한다. 이 경우, 당시 상황상 여성 기생이 궁중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었음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 공연을 수행한 인물이 남성 예인(즉, 사내기생)일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기생이라는 단어는 경우에 따라 기능적 호칭으로 전용되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된다.

      4) 장악원 내부의 등급과 호칭 구조

      장악원에는 계급 체계가 존재했다. 크게는 정(正), 종(從), 잡직(雜職)으로 나뉘며, 여기에 악공들이 배속되었다. 이 중 일부는 ‘정재 담당 무동’으로 전문화되었고, 이들은 보통 실무적인 직위이기보다는 기능 수행자로서의 인력으로 분류되었다. 이름 없는 존재로, 명단에는 숫자로만 기록되었으며, 예능 수행자에 대한 인격적 존중이나 서사적 기록은 거의 남지 않았다.

      5) ‘예인(藝人)’이라는 포괄 개념

      사내기생은 실질적으로는 ‘예인’이다. 즉, 전문적인 예술 기능을 수행하는 직업인이었다. 현대의 시선으로 보면 ‘예술 노동자’라는 표현이 어울리지만, 조선 시대에는 예인은 예술 기능을 가졌다는 점에서 신분적으로도 중인 혹은 천인의 경계선에 위치한 미묘한 존재였다.

      장악원에 소속된 예인들은 ‘기능’은 뛰어났으되, 신분상 상승은 제한되었고, 이름 없는 존재로 남을 가능성이 컸다. 사내기생은 예인이라는 구조 안에서 활동했지만, 그 예술성이 아니라 ‘성별의 특수성’으로 인해 더더욱 이름을 잃은 채 기록된 존재였다.

      결론

      사내기생은 조선에서 분명히 존재했던 남성 예술가였다. 하지만 그들의 공식 명칭은 ‘사내기생’이 아닌, ‘악공’, ‘무동’, 혹은 숫자로 대체된 익명성 속의 존재였다. 장악원이라는 국가 기관 안에서 정재와 음악을 수행했음에도, 그들의 이름과 정체성은 유교 윤리와 젠더 이데올로기의 벽에 가려졌다.

      이제 우리는 그들을 단지 ‘무동’이라 부르기보다, 조선의 예술을 실현한 퍼포머이자 젠더 경계를 넘나든 상징적 존재로서 복원하고 호명해야 한다.

      6. 사내기생의 실명이 아닌 지칭의 이유

      사내기생은 조선 궁중의 무대에서 실제로 존재했지만, 실명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의궤』 등 국가 기록물에서 이들의 등장은 거의 예외 없이 **‘악공 ○인’, ‘무동 ○인’, 또는 ‘정재를 수행한 인원’**처럼 기능 중심·집단 중심의 표현으로 이뤄진다. 이처럼 사내기생의 실명이 아닌 일반 지칭으로 기록된 데에는 정치적, 윤리적, 성별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1) 유교적 가치관의 제한 – 개인보다 질서

      조선은 성리학 이념을 국시로 삼은 철저한 유교국가였다. 유교는 개인보다는 집단의 조화와 질서를 중시하는 이념 체계였으며, 특히 여성이나 예술인을 공적 기록에 실명으로 드러내는 것을 ‘사사로움의 노출’로 여겼다. 사내기생은 남성이었지만 여성의 역할을 수행했고, 그 춤과 몸짓은 정숙한 무대 안에서도 '성적 이질성'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는 개인의 이름보다 기능만 드러내는 방식이 훨씬 안전하고 바람직한 기록 방식으로 여겨졌다. 이름을 남기는 것은 곧 ‘정체성을 인정하는 일’이었기에, 사내기생 같은 존재는 애초에 이름 없이, 기능적 지칭만으로 처리되었다.

      2) 낮은 신분과 사회적 편견

      사내기생이 속한 장악원 예인은 중인 이하, 또는 천인 계급으로 분류되었다. 이는 곧, 공적 문서에 이름을 올릴 만한 ‘격’이 없다는 사회적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조선 사회에서는 이름이 기록되는 것 자체가 신분적 특권이었다. 대신, 하층민이거나 경계인의 경우 이름은 생략되고, 직능만으로 기록되거나, 심지어 숫자로만 나타났다.

      즉, 사내기생의 이름이 남지 않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신분제도와 기록 원칙의 일관된 결과였다. 춤을 추고 음악을 만들어냈던 이들은 그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가질 자격이 없는 사람들’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3) 성 역할을 넘나든 존재에 대한 불안

      사내기생은 남성이었지만 여성 복식을 입고, 여성 동작을 연기했다. 유교 사회에서 이런 존재는 **사회적 경계를 흐리는 ‘불안한 타자’**로 인식되기 쉽다. 이름을 기록한다는 것은 곧, 그 존재를 공인하는 일이자 역사에 남기는 행위이다.

      조선은 성 역할과 신분 구조가 정교하게 설계된 사회였다. 사내기생처럼 젠더의 이분법을 넘나드는 인물은 체제 안에서는 필요했지만, 체제 밖으로는 드러나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이름을 기록하지 않고 기능만 남긴 이유는, 이들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존재를 ‘통제된 방식’으로만 인정하기 위함이었다.

      4) 역사 기록의 서술자 – 관료 중심의 한계

      조선의 공식 기록은 왕명에 따라 사관이나 관료가 기록했다. 이들은 왕과 고위 관료, 사대부 계층의 시각으로 세상을 기술했다. 무대 뒤의 무희, 노래하는 예인, 장막 속의 하인을 주인공으로 삼을 이유가 없었다. 역사 기술의 주체가 귀족이었던 만큼, 그들의 세계에 사내기생은 조연조차 되지 못했다.

      공연이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만, 그 공연을 누가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명 대신 기능만 남긴다는 것은, 곧 그들을 ‘일회적 도구’로 취급한 기록의 관성이기도 하다.

      5) 기록에서 ‘지움’의 전략

      조선 사회는 불편한 존재를 직접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사라지게 만드는 기술에 능했다. 이는 유배, 무관의 임명, 기록 생략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구현되었다. 사내기생도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되, 이름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지금까지도 사내기생에 대한 사회적 혼란과 편견을 만든 근원이기도 하다. 기록이 실명을 말하지 않았기에, 후대는 그들을 실체 없는 환상처럼 여겼고, ‘기생’이라는 단어만 남아 오해와 왜곡이 쌓여갔다.

      결론

      사내기생의 이름이 남지 않은 것은 단순한 기록의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유교 윤리, 신분제, 젠더 질서, 역사 서술 체계가 만들어낸 구조적 침묵이었다. 그들은 조선의 무대를 빛낸 예술가였지만, 그 정체성은 역사에서 은폐되었다.

      그러나 기능만 남은 그 기록들, ‘○인’, ‘무동’, ‘정재를 올리다’ 같은 간접적 언어들 속에는 분명히 살아 숨 쉬는 예술가, 조선의 젠더 유연성, 그리고 지워진 이름의 역사가 존재한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침묵의 언어를 다시 읽어내고 잃어버린 이름들을 불러내는 일이다.

      7. 실록 외 의궤와 승정원일기에서의 보완 기록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역사의 근간이 되는 1차 사료이지만, 모든 것을 기록하지는 않았다. 특히 실명보다는 정치·군사·행정 중심의 공식 사건을 중점적으로 다루기에, 예술·풍속·의례와 같은 문화적 맥락의 세부 사항은 종종 축약되거나 생략된다. 사내기생처럼 제도적 틀에 있으나 이름조차 남기기 어려웠던 존재들은 실록에서 더욱 희미한 자취로만 남는다. 이런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바로 **의궤(儀軌)**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이다.

      1) 의궤 – 행사와 예식의 모든 절차를 기록한 ‘그림 사료’

      의궤는 조선 왕실에서 시행된 각종 국가 행사(왕의 즉위, 장례, 혼례, 진연 등)의 세부 절차, 동원 인력, 물자 사용, 공연 순서 등까지 일일이 정리한 공식 기록집이다. 특히 의궤는 그림(반차도)을 통해 시각적으로 당시의 장면을 복원할 수 있어, 사내기생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이다. 이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 가는 행차를 상세히 기록한 책으로, 행렬 중간중간 정재를 펼치는 예인들, 무동들의 복식, 역할, 위치까지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장악원 악공 ○인, 무동 ○인, 춘앵전(春鶯囀) 1항 연행.”
      이라는 문구는 ‘무동’이 정재를 직접 공연했음을 뜻하며, 그림에서는 화려한 복식을 입은 남성 무희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는 사내기생이 실록에서는 명시되지 않지만, 의궤에서는 시각적·기능적으로 명확히 존재했음을 입증해준다.

      2) 승정원일기 – 일상적인 궁중 기록의 보고

      승정원일기는 왕명 수행과 궁중 내부 사무를 기록한 실시간 업무 일지로, 조선 전기의 실록이 주로 왕의 말과 대신들의 논의에 집중되어 있다면, 승정원일기는 훨씬 더 세밀하고 일상적인 궁중의 사정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악공의 파견 요청, 무동의 공연 준비, 의상 대여, 악기 수급, 리허설 보고 등 장악원 예인의 실제 활동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실명이 아니라 하더라도, **‘누가’, ‘무엇을 위해’, ‘어떤 무대를 준비했는가’**가 상세히 적혀 있다.

      예시:

      “금일 연향에 사용될 정재 ‘무고’에 장악원 소속 무동 8인 차출 요청. 의복 및 장구는 별도 지급.”
      이와 같은 기록은 실록에서 간단히 “정재를 올렸다”고만 서술된 장면의 구체적 준비 과정과 실무자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 속에 등장하는 ‘무동’은 곧 ‘사내기생’의 또 다른 얼굴이다.

      3) 실록에서 빠진 개인의 흔적 – 숫자 대신 존재로

      실록은 주로 요약적이고 사건 중심이다. 반면 의궤와 승정원일기는 공연을 준비한 사람들, 리허설에 참여한 인원, 공연 당시의 군무 구성과 인원 배치, 의상과 분장까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실록이 ‘숫자’로만 남긴 사내기생의 존재를 의궤와 승정원일기가 구체화하고, 실체화해준다.

      특히 장악원의 근무 명단이나 출무 상황, 심지어 왕의 연회에서 ‘무동 ○○이 춤을 잘 추어 칭찬받았다’는 식의 코멘트가 붙는 경우도 존재해, 실명에 가까운 표현들이 드물게나마 나타난다. 이는 그들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실제 감동과 반응을 불러일으킨 예술가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4) 예인으로서의 사회적 위치도 보완 가능

      의궤와 승정원일기는 또한 장악원 소속 예인들의 복무 기간, 이직, 병결, 신분 문제 등 사회적 조건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예를 들어,

      “악공 ○○, 연행 중 족상(足傷)으로 교체 요청.”
      이라는 기록은 단순한 부상 보고가 아니라, 실제 예인이 공연 중 부상을 입었고, 그 자리에 대체자가 필요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기록이다.

      이는 사내기생이 ‘무대의 장식’이 아니라, 엄연히 책임과 기술을 갖춘 노동자이자 예술가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결론

      실록이 남기지 못한 사내기생의 세부 모습은 의궤의 그림과 절차, 승정원일기의 실무적 기록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실명은 여전히 없을지라도, 이들의 존재는 더 이상 추상적이지 않다. 춤을 추고, 옷을 입고, 악기를 다루고, 땀 흘려 리허설을 반복했던 조선의 예술 노동자로서, 사내기생은 이 보완 기록들 속에서 확연히 존재감을 드러낸다.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알 수 없다 해도, 그들이 남긴 무대와 발자취는 복원될 수 있다. 이제는 실록이라는 좁은 창문만이 아니라, 다양한 기록과 시각적 사료를 통해 이들에 대한 온전한 서사를 복원해야 할 때다.

      8. 기록의 공백이 말하는 조선의 젠더 이데올로기

      조선 사회에서 사내기생은 분명히 존재했고, 궁중 의례와 국가 행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그 존재는 실명 없이 기능으로만 기록되었고, 대부분의 경우 ‘악공’, ‘무동’, ‘○인’ 등으로 축약되었다. 이처럼 기록의 공백은 단순한 누락이 아니라, 조선 사회의 젠더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의도된 ‘침묵’이었다.

      1) 성별 이분법을 절대시한 유교적 틀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국가였다. 성리학은 세상을 음양의 조화로 이해했고, 그 조화는 명확한 이분법적 질서 속에서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다. 남자는 밖(공적 세계), 여자는 안(사적 공간)에 있어야 하며, 각자의 위치와 역할을 벗어나는 것은 혼란을 야기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남성임에도 여성처럼 춤추고 노래하며 치장한 사내기생의 존재는 이질적이었고, 위험한 경계인의 모습이었다. 존재는 필요했지만,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불온했다. 결국 이들은 ‘기록할 수 없는 존재’로 간주되었고, 기록은 이름이 아닌 기능만을 허용했다.

      2) 젠더의 경계자에게 부여된 침묵의 전략

      사내기생은 단순한 예인이 아니라, 조선이 자의적으로 만든 젠더 경계자였다. 남성이라는 신체를 가졌지만, 여성의 몸짓과 의상을 입고 무대에 올라야 했으며, 그들의 존재는 궁중의 권위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존재는 체제를 위협하지 않도록 철저히 통제되고 규정된 영역 안에서만 허용되었다. 기록에서조차 ‘누구인지’가 아니라 ‘무엇을 했는지’만 남기게 한 이유는, 이들이 사회적 정체성을 갖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즉, 그들은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남았다.

      3) 공백은 억압의 흔적이다

      역사에서의 ‘기록 부재’는 종종 정치적 억압이나 문화적 불편함의 반영이다. 사내기생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도 중요했고, 그만큼 사회적으로 불편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그 불편함을 드러내기보다는, 기능만을 남기고 정체성을 삭제함으로써 체제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는 오늘날 젠더 소수자들이 겪는 지워짐, 침묵 강요, 정체성 삭제의 역사와 유사하다. 사내기생은 조선시대의 무대에서, ‘필요한 타자’로서 환영받았지만, 이름을 가질 수 없었던 존재였다. 그 기록의 공백은 곧, 조선 사회가 젠더의 유연성을 어떻게 억압했는지를 드러내는 중요한 지표다.

      4)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

      사내기생의 이름을 복원하는 일은 단지 한 사람의 역사적 자취를 찾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 사회가 어떤 젠더 질서를 구축했고, 어떤 존재를 주변화했는지를 들여다보는 일이다. 기록에서 사라진 이름들을 통해, 조선의 젠더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고, 오늘날 젠더 다양성과 표현의 자유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사내기생의 존재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들이 춤을 췄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가 무대 뒤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무대를 밝히는 조명 뒤에는 언제나 그림자가 존재했고, 그 그림자를 다시 불러내는 일이야말로,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살아있는 역사로 되돌리는 첫걸음이다.

      결론

      『조선왕조실록』과 다양한 기록에서의 공백은 실수나 무관심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명확한 이념, 의도된 질서, 사회적 통제의 결과다. 그 공백 속에는 젊은 사내기생의 무대 위 흔들리는 치맛자락, 섬세한 손끝, 숨죽인 무대 뒤의 존재감이 숨어 있다.

      조선은 그들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 공백을 통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없었던 역사가 아니라, 감춰진 역사다. 그리고 그 감춰진 역사를 다시 꺼내는 일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해야 할 역사쓰기다.

      9. 실록 속 사내기생 복원 시도와 현대적 의의

      최근에는 사내기생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이들의 존재를 실록과 주변 사료를 종합해 재구성하려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는 단지 흥미로운 ‘조선의 이색 인물’을 발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음과 같은 현대적 의미를 지닌다.

      • 역사 기록의 권력성을 비판
      • 젠더 표현의 다양성과 문화적 유산을 연결
      • 조선의 예술 노동의 본질 재해석
      • 공연예술사에서 성별 고정관념의 해체

      우리가 실록 속 사내기생을 복원하는 행위는 단순한 과거 탐색이 아니라, 기억에서 배제된 존재를 다시 역사로 되돌리는 행위다. 이 복원은 곧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역사를 쓰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