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야의 조선시대 '사내기생'

조선 시대 ‘사내기생’

  • 2025. 6. 4.

    by. 유니야15

    목차

      1. 남성도 기생이었다? 우리가 몰랐던 세계의 사례들

      “기생은 여자만 있었다?”
      우리가 오랜 시간 당연하게 여겨온 이 통념은, 세계 각국의 예술사를 들여다보면 쉽게 무너진다. 조선의 사내기생은 그 대표적 예외로 알려졌지만, 사실 전 세계에는 ‘남성 기생’ 혹은 여성 역할을 수행한 남성 예인들이 꽤 존재했다. 그리고 이들은 단지 여장을 한 것이 아니라, 당시 문화와 권력, 예술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인도: 신성한 몸짓, 남성의 여성화된 무용

      인도의 전통 무용인 **카타칼리(Kathakali)**는 그 격식과 화려함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주목할 점은 이 무용이 모든 등장인물을 남성 무용수가 맡는 구조라는 점이다. 심지어 여성 역할까지도 철저한 훈련을 받은 남성 무용수가 연기한다.
      카타칼리 무용수들은

      • 여성적인 손동작,
      • 눈동자의 떨림,
      • 느린 걷기와 고개 돌림 등을
        정교하게 연습하여, 신화 속 여신이나 전설적 여성을 구현해낸다.

      이것은 단지 성별을 흉내 내는 수준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젠더 정체성을 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수행적 행위다. 즉, ‘남성 기생’이라기보다, 젠더 표현의 전문 예인인 셈이다.

      일본: 오나가타(女形), 여성 역할의 예술적 정점

      일본 가부키(Kabuki) 공연은 화려한 의상과 상징적인 몸짓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 무대 위에서 여성 역할을 맡는 배우는 오나가타(女形), 즉 ‘여성 형상’을 연기하는 남성이다.
      에도 시대, 여성의 가부키 출연이 금지되면서 남성 배우들이 여성 역할을 맡게 되었고, 시간이 지나며 이는 일종의 전통 예술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오나가타는 단순히 여성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 이상화된 여성 이미지,
      • 절제된 감정 표현,
      • 정교한 화장법과 자세,
      • 발끝까지 계산된 움직임을 통해
        ‘무대 위 여성’이라는 개념을 창조하는 퍼포머였다.

      조선의 사내기생과 마찬가지로, 오나가타 역시 남성의 신체로 여성의 예술성을 표현해내는 상징적 존재였다.

      유럽: 발레 무대 위의 남자, 여성을 연기하다

      17세기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 시대에는 발레가 궁정 예술로 크게 성장했다. 이 시기에는 여성이 무대에 서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 발레 공연에서 여성 역할은 대부분 남성이 맡았다.
      이들 중에는 정식 훈련을 받은 남성 무희들이 여성의 의상과 동작, 섬세한 손끝 표현을 익혀 완전한 여성 캐릭터로 무대에 등장했다.

      특히 하이힐, 가발, 과장된 손동작은 발레 무대의 상징처럼 자리잡았고, 이는 남성 예인이 수행한 젠더 퍼포먼스의 또 다른 양상으로 볼 수 있다.

      남성 기생은 예외가 아니라, 문화의 일부였다

      이러한 세계 각국의 사례를 종합해보면, 남성 기생 또는 남성 예인이 여성 역할을 수행하는 문화는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 시대와 지역에 따라 이유는 다르지만,
      • 여성의 무대 출입이 제한되었거나,
      • 젠더 역할의 상징적 전달이 중요시되었거나,
      • 혹은 남성이 여성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적 기술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즉, 조선의 사내기생은 세계 속에서도 유사한 구조와 문화적 기반 위에 형성된 존재였으며, 예외라기보다는 보편적 현상의 한 갈래로 보아야 한다.

      2. 조선의 사내기생, 궁중 예술을 책임진 남성 예인

      조선의 사내기생은 단순히 ‘여장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국가가 직접 양성하고, 왕실이 의례와 문화 행사에서 핵심 인력으로 활용한 남성 예인이었다. 흔히 '기생'이라는 단어가 풍류와 유흥의 이미지로만 소비되지만, 사내기생은 장악원이라는 관청에 소속되어 철저히 관리되며 공적인 예술 수행자로 활동했다. 이들의 존재는 조선의 정치, 문화, 예술을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장악원, 국가가 운영한 문화 교육 기관

      사내기생의 훈련과 소속은 ‘장악원’이라는 관청을 통해 이루어졌다. 장악원은 왕실 음악과 무용을 담당한 조선의 국립 예술 아카데미로, 여기서 남성 예인은

      • 악기 연주,
      • 정재(呈才) 무용,
      • 성악,
      • 의례 진행 등을 배우고 숙달해야 했다.

      특히 정재는 단순한 춤이 아닌, 국왕의 권위와 국가의 질서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적 공연이었다. 그 안에서 사내기생은 여성 역할을 수행하며

      • 부드러운 동작,
      • 화려한 복식,
      • 상징적 손짓 등을 통해 젠더를 연기하고, 의례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이러한 퍼포먼스는 개인의 끼나 감각이 아닌, 반복된 훈련과 훈도(교사)의 지도 아래 철저히 형식화된 예술 표현이었다.

      예술은 곧 권위였다 – 사내기생의 존재 이유

      조선 왕실은 외교 사절 접견이나 국가 경사 시 정재 공연을 통해 왕권의 위엄을 표현했다. 이러한 자리에서 사내기생은

      • 고도의 음악성과 무용성을 갖춘 퍼포머이자,
      • 의례적 연출의 일부로 기능했다.

      특히 여성이 제한된 궁중에서, 사내기생은 여성성을 연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이는 단지 성별의 대체가 아니라,
      → 국가 시스템이 ‘남성’의 몸을 통해 ‘여성’의 이미지를 안정적으로 통제하려는 구조적 선택이었다.

      이로써 사내기생은 왕실 권력 아래 안전하게 조직화된 예인이 되었고, 이는 유교적 질서 속에서 젠더 역할을 유지하면서도 예술을 구현할 수 있는 절묘한 방식이었다.

      왕이 주목한 남자, 사내기생

      흥미롭게도 사내기생은 조선의 여러 왕으로부터 직접 평가받고, 선택된 존재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정조는 정재 공연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 각 기생의 외모, 태도, 연기력, 무용실력 등을 꼼꼼히 점검했고,
      • 때로는 장악원 훈도를 질책하거나 상을 내리기도 했다.

      왕의 시선 아래 활동하던 사내기생은 단지 예술가가 아니라 **왕실의 이미지와 위엄을 구현하는 일종의 '문화 외교관'**에 가까웠다.
      또한 왕이 직접 명명한 무용 또는 음악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기생들의 이름이 기록되기도 했는데, 이는 곧 그들의 퍼포먼스가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행위였음을 입증한다.

      정재, 사내기생, 그리고 조선의 시각 예술

      사내기생이 담당한 정재는 무용, 음악, 복식, 퍼포먼스가 하나로 결합된 종합 예술의 극치였다. 무대 장면은 오늘날까지도 풍속화나 궁중 기록화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안에 등장하는 **‘여성처럼 보이는 남성 무용수’**는 대개 사내기생일 가능성이 높다.

      즉, 그들은 단지 무대 위 한 장면이 아닌, 조선 시각 문화와 시청각 예술 전체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였던 셈이다.

      3. 일본, 인도, 유럽의 남성 예술가와 기생 문화

      조선의 사내기생은 특별한 존재였을까?
      사실 그렇지 않다. 남성 예인이 여성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예술 활동에 나선 예는 세계 곳곳에서 확인된다. 동아시아부터 남아시아, 유럽까지 남성이 '여성성'을 연기하며 예술의 중심에 서 있던 문화적 현상은 꽤 보편적이었다. 다만 시대적 조건과 사회적 해석이 다를 뿐이었다.

      조선의 사내기생은 장악원이라는 국가 기관에 소속된 예인이었다면, 다른 나라의 남성 예술가들은 보다 다양한 형태로 존재했다. 이 장에서는 일본, 인도, 유럽 등에서 활동한 남성 예인의 사례를 통해 조선의 사내기생을 비교 문화적으로 이해해보자.

      남자도 기생이었다? 세계 각국의 남성 예인 비교

      🇯🇵 일본 – 오나가타(女形), 가부키 무대 위 이상화된 여성

      에도 시대 일본의 가부키(Kabuki) 공연은 현대까지 이어지는 전통 연극 형식이다.
      초기에는 여성 배우도 있었지만, 성매매와의 연결 문제로 여성 출연이 금지되면서 남성 배우가 여성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오나가타(女形)’다.

      오나가타는 단순히 ‘여장을 한 남자’가 아니라,

      • 여성의 언어,
      • 몸짓,
      • 감정의 흐름,
      • 복식까지 완벽히 숙련해야 하는 고도의 예술 장인이다.
        이들의 연기는 현실 여성보다 더 이상화된 존재로 여겨졌고, 가부키 무대에서 여성성 그 자체를 구현하는 예술적 상징으로 기능했다.

      이런 맥락에서 오나가타는 조선의 사내기생과 비슷한 구조를 갖는다. 모두 사회적으로 허용된 남성의 여성 연기자였고, 국가나 전통의 보호 속에서 활동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 인도 – 카타칼리 무용수, 여신의 몸짓을 빌린 남자들

      인도 남부의 케랄라 지역에서 전해지는 전통 무용 **카타칼리(Kathakali)**는 종교적 설화와 신화를 바탕으로 한 전통 공연이다. 흥미로운 점은,

      • 무대에 오르는 배우는 모두 남성이며,
      • 여성 캐릭터 역시 남성이 연기한다는 것이다.

      카타칼리 무용수는 얼굴에 강렬한 색채로 분장하고, 과장된 눈동자와 손짓으로 감정을 표현한다. 특히 여성 역할을 맡은 남성은 여성성을 완벽히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동시에, 신의 존재를 몸에 구현하는 성스러운 임무를 수행한다.

      이는 조선의 사내기생이 정재를 통해 국가 권위를 시각화했던 역할과도 맞닿아 있다.

      • 단순한 무용이 아니라,
      • 신화적 상징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담아낸 퍼포먼스.
        그 수행자가 남성이라는 점에서 인도의 무용수와 사내기생은 젠더를 표현 수단으로 전유한 예술가로 볼 수 있다.

      🇫🇷 프랑스 – 17세기 발레의 남성 무희들

      유럽에서도 남성이 여성 역할을 연기한 대표적인 예는 17세기 프랑스 발레다. 당시에는 여성의 무대 진출이 제한되어 있었기에, 여성 역할은 모두 남성 무희가 맡았다. 특히 루이 14세는 발레에 깊은 애정을 가졌고, 직접 발레를 추기도 했다.

      초기 발레 공연에서는

      • 남성 무희가 가발, 코르셋, 드레스를 입고
      • 여성 무용수의 섬세한 동작을 연기했으며,
      • 발끝의 움직임 하나까지도 철저히 통제된 형태로 훈련되었다.

      이 무희들은 왕실의 후원을 받았으며,
      귀족 사회에서 ‘남성 예인’으로서 높은 문화적 위상을 누렸다.
      조선의 사내기생과 비교하면, 오히려 사회적 처우 면에서는 유럽 무희가 더 인정받았다고 볼 수도 있다.

      문화는 다르지만, 남성 기생은 세계 어디에나 있었다

      조선의 사내기생, 일본의 오나가타, 인도의 무용수, 유럽의 무희.
      이들의 공통점은

      • 남성이 여성 역할을 맡았으며,
      • 그 표현은 단지 흉내가 아닌 고도의 훈련을 요하는 예술 행위였고,
      • 국가, 종교, 전통이라는 제도 안에서 허용되고 심지어 장려되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젠더 경계를 넘나드는 퍼포먼스를 통해

      • 신의 뜻을 전달하고,
      • 왕의 권위를 드러내며,
      • 대중의 감정을 흔들었다.

      즉, 남성 기생은 어떤 면에서는 가장 정치적이고 상징적인 예술 노동자였다고도 할 수 있다.
      조선의 사내기생은 이러한 세계적 흐름 속에 있는 존재였다. 우리는 이제 그들을 조선이라는 좁은 범주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글로벌 예술사 속의 젠더 유연한 표현자로 다시 바라보아야 할 때다.

      4. 젠더를 연기하다: 남성 기생의 공통된 퍼포먼스 특성

      남성이 여성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여장을 한다는 의미일까?
      조선의 사내기생, 일본의 오나가타, 인도의 카타칼리 무용수, 프랑스 발레의 남성 무희들 모두가 보여준 공통점은, ‘젠더를 단순히 흉내 내는 것’을 넘어서, 정교하게 훈련된 퍼포먼스로 여성성을 구현했다는 점이다. 이들의 몸짓, 표정, 복식, 말투, 움직임은 모두 철저한 계산과 상징의 결과였으며, 젠더 자체를 예술적 표현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젠더는 ‘존재’가 아닌 ‘연기’였다

      이 퍼포먼스의 핵심은 바로 젠더는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수행되는 역할이라는 점이다.

      • 조선의 사내기생은 ‘여성적 아름다움과 고요함’을 표현하기 위해 손끝의 곡선까지 훈련받았고,
      • 일본의 오나가타는 여성의 내면 감정까지 재현하기 위해 말투, 숨소리, 눈빛까지 익혔다.
      • 인도의 무용수들은 신화를 체현하며 여신의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몸의 균형과 의식을 조율했다.

      이 모든 행위는 단순한 ‘여성 흉내’가 아닌,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象)을 무대 위에서 실현하는 퍼포먼스였다. 그리고 이를 완성한 이들은 바로 남성이었다.

      젠더 퍼포먼스의 3대 공통 구조

      1. 훈련의 반복성과 규율성
        • 남성 기생들은 모두 체계적인 교육 체계 안에서 ‘여성성’을 배웠다.
        • 조선 장악원의 기생 교육, 일본 가부키 학교, 인도 전통 무용 가르침은 모두 여성의 신체 언어를 정형화하여 가르쳤다.
        • 이는 예술이자 동시에 ‘성 역할의 복제 기술’이었다.
      2. 몸을 통한 상징성의 구현
        • 무대 위에서 이들의 몸은 단순한 신체가 아니라 젠더를 상징하는 기호체계였다.
        • 사내기생의 팔 동선, 오나가타의 치맛자락 조절, 프랑스 무희의 손끝 등 모든 움직임은 관객에게 여성이라는 환상을 전달하기 위한 장치였다.
      3. 제도권의 수용과 통제
        • 이들의 퍼포먼스는 국가나 종교, 궁중 같은 제도권이 허용한 젠더 유연성이었다.
        • 궁중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던 사내기생, 신화의 해석자였던 인도 무용수, 법적 규제로 여성 출연이 금지되어 등장한 오나가타는 모두 ‘통제된 젠더 전환’을 수행한 존재였다.

      젠더 퍼포먼스의 효과 – 보는 이도, 하는 이도 달라졌다

      이 퍼포먼스는 단지 무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 관객은 남성임을 알면서도 무대 위 여성에게 감정이입했고,
      • 연기자는 스스로의 남성성을 잠시 거두고 사회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여성성을 몸에 입혔다.

      결과적으로 이는 예술이라는 장치 안에서,
      ‘젠더는 연기될 수 있다’는 인식과 함께, 젠더 정체성의 유동성을 드러내는 장이 되었다.

      사내기생은 조선의 유교적 한계 속에서도 그 몸으로 여성성을 구현한 예술가였고,
      이와 비슷한 존재들은 세계 곳곳에서 예술이라는 언어로 젠더를 해체하고 조립하고 있었다.

      5. 사회적 지위와 인정의 차이 – 조선과 세계의 온도차

      남성 기생 혹은 여성 역할을 수행한 남성 예인은 전 세계적으로 존재했지만, 그들이 받은 사회적 대우와 문화적 위치는 나라별로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조선의 사내기생은 국가가 훈련시킨 궁중 예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는 ‘기생’이라는 경계적 위치에 머물렀다. 반면 일본이나 유럽의 경우, 같은 유형의 예인들이 일정 수준의 존중과 상징적 지위를 부여받기도 했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온도차의 원인과 구조적 배경을 살펴본다.

      조선 – 공적인 예술인, 사적인 편견

      사내기생은 장악원 소속의 국가 예술인으로,

      • 왕실 연회, 외국 사신 접대, 종묘 제례 등에서 ‘정재’를 통해 활약했고
      • 정조 등 일부 군주들로부터 높은 예술적 평가도 받았다.

      하지만 사내기생이 대중적으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조선 사회는 유교적 신분제 구조 속에서

      • 기생은 ‘천인’ 계급과 유사한 주변부 존재로 간주되었고,
      • 남성임에도 여성성을 연기한다는 점은 사회적 위화감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사내기생은 국가가 필요로 한 ‘공적 존재’이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인정받기 어려운 경계적 존재였던 것이다.

      🇯🇵 일본 – 오나가타는 스타였다

      에도 시대 오나가타는 가부키의 중심이었다.

      • 그들은 여성 관객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 연기력과 미적 감각이 탁월한 오나가타는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숭배받기도 했다.

      비록 현실 세계에서는 남성이었지만,

      • 무대 위에서 표현하는 여성은 실제 여성보다 더 여성답다는 인식이 있었고,
      • 이는 사회적 존중과 예술적 명성으로 이어졌다.

      즉, 오나가타는 사내기생과 달리
      ‘예술을 위한 젠더 퍼포먼스’가 곧 대중적 지지와 자산이 되는 구조 속에 있었다.

      🇫🇷 유럽 – 귀족의 무희, 혹은 왕의 연인

      17세기 프랑스에서는

      • 남성 무희가 여성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무대 관행이었다.
      • 여성 무용수의 등장이 늦어진 덕분에, 발레 무대는 오랫동안 남성의 젠더 퍼포먼스 중심으로 발전했다.

      이들 중 일부는 왕실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고,
      귀족들과의 친분, 궁정 행사 참여, 후원자 연결 등을 통해

      • 단지 공연자가 아닌 상류 문화의 구성원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온도차의 핵심 – 젠더 역할에 대한 사회의 해석

      조선의 사내기생이 주변부로 밀려난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그 핵심에는 조선이 지닌 유교적 가치관과 젠더 이분법의 경직성이 있었다.

      • 남성이 여성적 특성을 보이는 것 자체가 ‘불안’으로 간주되었고,
      • 여성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으로 해석된 것이다.

      반면 일본이나 유럽은

      • 종교적, 문화적 이유로 여성의 예술 참여를 제한했기에
      • ‘남성이 대신 여성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보완책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 대체행위가 반복되며 하나의 예술 장르와 정체성으로 승화되었다.

      결국 사내기생은 시대와 문화 속 젠더에 대한 시선 차이, 권력과 예술의 관계, 신분제도라는 다층적 요소 안에서
      ‘필요하지만 불편한 존재’로서 미묘한 지위를 지녔던 셈이다.

      6. 왜 남성 기생은 역사에서 사라졌는가

      사내기생은 단순히 조선의 특수한 문화현상일까?
      아니다. 그들은 젠더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떻게 문화와 예술 속에서 구체화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강력한 렌즈다. 동양과 서양, 유교와 기독교, 계급사회와 귀족문화의 차이 속에서, 남성의 여성성 연기는 매우 다른 의미로 해석되고 다른 운명을 맞았다.

      이 항목에서는 사내기생을 중심으로 동서양의 젠더 인식이 어떻게 다르게 작동했는지를 비교하고, 그 문화적 뿌리와 사회적 수용의 온도차를 조명한다.

      동양 – 성 역할의 고정성과 ‘조화’의 미학

      조선, 일본, 인도와 같은 동양 문화권에서는 성별 역할이 철저히 고정되어야 한다는 유교적 또는 힌두교적 이상이 존재했다. 그러나 동시에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는 동양의 전통은,

      • 남성이 여성성을 잠시 빌려 연기하는 예술 퍼포먼스를 특정 공간에서만 허용했다.
      • 이는 성역할의 전복이 아닌, 예술을 위한 상징적 도구로서의 여성성 차용이었다.

      예를 들어,

      • 조선의 사내기생은 궁중이라는 폐쇄된 공간 안에서만 활동했고,
      • 일본의 오나가타는 무대에서만 여성성을 허용받았으며,
      • 인도의 무용수는 신의 의지를 전달하는 매개체로만 ‘여신’을 연기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구조는 동양 사회가 젠더를 엄격히 나누면서도,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그 경계를 허용하는 이중적 시선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서양 – 젠더보다 퍼포먼스를 중시한 사회

      반면 유럽에서는 젠더 역할보다 ‘예술성과 표현의 완성도’에 더 큰 가치를 두는 경향이 있었다.

      • 르네상스 이후 인간 중심주의가 강화되면서, 신체와 표현은 미학적 도구로 인식되었고,
      • 젠더는 그 표현의 일환일 뿐, 존재론적 위협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 남성 무희가 드레스를 입고 여성 동작을 취하는 행위는
      • 종종 미적 이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받아들여졌고,
      • 무대 밖에서도 예술가로서의 지위는 일정 부분 유지되었다.

      즉, 서구는 동양보다 젠더 유연성에 대해 비교적 실용적이고 표현 중심적인 태도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젠더 유연성’에 대한 해석의 간극

      사내기생과 같은 존재는

      • 동양에서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만 허용되는 특수한 인물’로,
      • 서양에서는 ‘예술적 정체성을 가진 전문인’으로 이해되었다.

      이 차이는 결국 젠더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 조선은 젠더 전환을 불안정한 질서의 교란으로 간주했지만,
      • 유럽은 그것을 예술적 수사이자 미의 실현 방식으로 여겼다.
      • 일본은 그 중간 어딘가에서, 극도로 정형화된 젠더 재현을 예술로 고정시켰다.

      사내기생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결국 사내기생은 단지 조선의 ‘남자 기생’이 아니라,

      • 동양 문화가 젠더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가 어떤 방식으로 허용되고 억압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사회적 미시사(微視史)의 열쇠다.

      사내기생은 존재 자체로 질문을 던진다:

      • 젠더는 타고나는가, 연기되는가?
      • 예술은 성을 뛰어넘는가, 복제하는가?
      • 우리는 지금 이들과 얼마나 다르며, 얼마나 같은가?

      7. 오늘날 성역할과 예술을 다시 바라보는 렌즈

      남성이 여성의 역할을 연기하며 예술 무대에 선다는 것은 단순한 ‘공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당대 사회의 젠더 인식과 예술의 경계를 시험하는 정체성의 퍼포먼스였고,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문화사적 의미와 여운을 남기고 있다. 조선의 사내기생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활동했던 남성 예인은 젠더, 예술, 권력 구조를 복합적으로 드러낸 살아 있는 기호였다.

      이 장에서는 남성 기생들이 남긴 예술적 유산과 젠더 논의에 미친 영향을 정리하고, 그것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짚어본다.

      무대 위의 유산 –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내기생은 대부분 역사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무용과 음악, 의례와 퍼포먼스는 여전히 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다.

      • 오늘날 ‘정재(呈才)’로 복원되는 궁중 무용 대부분에는 사내기생이 실연자였던 기록이 존재하고,
      • 장악원에서 발전한 음악 전통은 국립국악원의 연주로 계승되고 있다.

      일본 가부키의 오나가타, 인도의 카타칼리 무용, 프랑스 고전 발레 역시

      • ‘남성이 연기한 여성성’이라는 문화적 특수성을 지녔음에도
      • 지금까지 그 나라의 대표 전통예술로 자리잡았다.

      이는 예술의 본질이 성별이나 신분이 아니라,
      표현의 정교함과 감정의 전달 능력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젠더 논의의 씨앗 – 경계인으로서의 존재

      사내기생은 당시에도 지금도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 남성이지만 여성의 언어와 몸짓을 표현했고,
      • 예인이지만 기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 국가에 소속된 예술가였지만 사회적 인식은 그를 외곽으로 밀어냈다.

      이런 복합적 존재는 젠더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젠더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역할로 수행되는 것’이라는 현대 젠더 이론의 핵심을,
      • 사내기생은 수백 년 전 이미 예술로 실현하고 있었다.

      사내기생은 오늘날의 젠더 유동성, 퍼포먼스 젠더 개념, 문화적 표현의 자유
      다양한 논의의 ‘원형’처럼 기능할 수 있는 존재다.

      문화적 복원의 과제 – 그들을 잊지 않는다는 것

      이제 우리는 사내기생을 더 이상

      • 풍속화 속 장식적 인물로,
      • 궁중의 조연으로,
      • 역사책 밖의 인물로 남겨두어선 안 된다.

      그들이 남긴 예술과 존재의 흔적을 복원하고,
      그 정체성과 사회적 의미를 되짚는 것은 단지 역사 공부가 아닌, 현재를 비추는 거울의 작업이다.

      그들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은

      • ‘여성성’이 남성에게도 가능했음을,
      • ‘예술’이 경계를 넘어 존재했음을,
      •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을
        우리 사회가 인정하고, 이해하고,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