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야의 조선시대 '사내기생'

조선 시대 ‘사내기생’

  • 2025. 6. 4.

    by. 유니야15

    목차

      1. 조선의 여장남자? 그 호칭의 문제부터

      사내기생을 소개할 때 흔히 쓰이는 말 중 하나가 ‘조선의 여장남자’다. 하지만 이 표현은 이들을 설명하기에 너무 단순하고, 때로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이다. ‘여장남자’라는 단어는 현대의 시선으로 보면 성 정체성과 관계없이 단순히 남성이 여성의 복장을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조선 사회에서 사내기생은 단순한 코스튬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그들은 궁중 의례와 공연의 엄격한 규범에 따라 여성의 역할을 ‘전문적으로 수행한’ 궁중 예인이자 국가의 예술 인력이었다.

      단순한 여장이 아닌, 제도화된 역할 수행

      사내기생의 ‘여장’은 개인의 취향이나 성적 지향과는 관련이 없었다. 이들은 장악원의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후, 궁중 행사나 국가 제례 등에서 정해진 복식과 동작을 따라 공연을 해야 했다. 이 복식은 여성복장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정재(呈才)라는 공식 궁중 무용의 복장 규정에 따른 것이었다. 다시 말해, 사내기생이 여성처럼 보이게 꾸민 것은 어디까지나 국가 예법과 문화적 양식에 기반한 전문 직무 수행이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전통 무용에서 남자 무용수가 한삼(긴 소매 자락)을 두르고 여성스러운 동작을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여장’으로 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조선 시대의 사내기생이 그러한 복식과 춤을 수행한 것도 공연 예술의 일부로 이해해야 한다.

      '여장남자'라는 호칭이 만든 왜곡

      문제는 조선 후기 유교 사회가 성 역할에 대해 매우 엄격한 시선을 가졌다는 데 있다. 남성과 여성은 철저히 분리되어야 했고, ‘남성은 남성다워야 한다’는 도덕 기준이 존재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내기생은 ‘필요한 존재’이면서도 ‘부정적인 시선’의 대상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을 이해하려는 노력 없이, 후대의 일부 문헌과 민간 이야기에서는 사내기생을 단순히 “여장한 남자” 또는 “풍속을 어지럽힌 기이한 존재”로 묘사하기 시작했고, 현대에 와서는 이를 ‘여장남자’라는 단어로 오해하고 받아들이는 경우도 생겼다.

      하지만 이 같은 시선은 당시 사내기생이 수행한 문화적, 예술적, 사회적 역할을 축소하는 것이다. 이들은 왕 앞에서, 조정의 고관대작 앞에서, 정해진 복식과 정해진 동작으로 퍼포먼스를 수행하며 국가 문화의 한 축을 담당했던 사람들이다.

      ‘여장남자’ 아닌, 성 역할의 재해석자로 보기

      이제는 사내기생을 ‘여장한 남자’라는 표현으로 국한하는 것이 아닌, 젠더 표현의 경계를 넘은 문화적 존재로 재해석해야 할 때다.
      그들은 단지 여성처럼 꾸민 것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성 역할을 예술적 맥락에서 구현한 사람들이며, 이는 당대 성 역할에 대한 사회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상징적 실천이기도 하다.

      사내기생은 ‘여장남자’가 아닌, 조선 후기 궁중에서 성 역할을 넘나들며 예술로 표현한 경계의 존재였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단순한 외양의 차이를 넘어서, 시대와 문화, 권력과 표현의 맥락을 고려한 복합적 이해로 나아가야 한다.

      2. 사내기생의 하루 – 훈련, 화장, 예술

      사내기생의 하루는 철저히 짜인 규율 속에서 움직였다. 그들은 단순한 ‘기생’이 아니라, **국가 의례와 궁중 공연을 책임지는 예인(藝人)**으로서, 장악원의 체계적 훈련을 통해 탄생했다. 매일 반복되는 몸짓 훈련, 엄격한 예법 습득, 그리고 무대 위에서의 완벽한 퍼포먼스를 위해 이들은 삶의 대부분을 예술에 바쳤다.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기생의 ‘화려함’ 뒤에는 고된 노동과 집중력, 신체 훈련이 있었던 것이다.

      장악원에서의 훈련 – 예인의 탄생

      사내기생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장악원에 들어가 예술 교육을 받았다. 이 교육은 단순히 춤만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 **정재(呈才)**라는 궁중무용은 손끝, 발끝, 시선의 흐름까지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었고,
      • 거문고, 가야금, 대금과 같은 악기 연주를 병행하며,
      • 궁중 노래인 가곡이나 여민락 등 음악적 소양도 필수였다.

      예술적 감각뿐 아니라, 정치적 예절, 의례 지식, 무대 구성까지 배워야 했기에, 이들은 ‘무용수’를 넘어선 종합 예술가였다. 예인의 훈련은 군사 훈련에 버금가는 집중력과 체력을 요구했고, 수년간의 반복을 거쳐야만 공연 무대에 설 수 있었다.

      화장의 의미 – 미적 표현인가, 의례의 일부인가

      사내기생은 공연이나 공식 의례에 참여할 때, 여성처럼 분장을 했다. 흰 분을 바르고, 붉은 입술을 칠하고, 눈썹을 다듬었다. 겉으로는 여성처럼 보이게 꾸미는 과정이지만, 이는 단지 외모를 ‘여성화’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 조선 궁중의 예술은 시각적인 상징 체계에 따라 구성되었다.
      • 하얀 분은 ‘신성’과 ‘비일상’을 의미했고,
      • 붉은 입술은 생명력과 예술적 정열을 상징했으며,
      • 얇게 그린 눈썹은 ‘절제된 감정’과 ‘조선식 미의 기준’을 반영했다.

      즉, 사내기생의 화장은 궁중 정재의 시각적 언어였고, 예술적 규율의 일부였다. 그들의 분장은 **자아 표현이 아닌 ‘국가 의례의 얼굴’**이었으며, 단 하나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 예식의 일부였다.

      퍼포먼스로 완성되는 하루

      훈련과 분장을 마친 사내기생은 궁중 행사장으로 이동한다. 이들의 공연은 단순히 ‘춤을 보여주는 일’이 아니라,

      • 국왕의 권위를 드러내는 퍼포먼스,
      • 왕실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의례,
      • 외국 사신에게 조선 문화의 품격을 보여주는 외교적 무대였다.

      사내기생은 철저하게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동작을 수행하며 ‘무대 위의 질서’를 유지했다. 그들은 무대에서 여성이 되지 않았고, 남성도 아니었다. 사내기생은 그 자체로 ‘성 역할의 상징물’이자, 조선 궁중의 시각적 언어였던 것이다.

      사내기생의 하루는 ‘기예’이자 ‘국가적 연출’

      결국 사내기생의 하루는 단순한 기예가 아니라, 조선 사회가 성과 권력, 예술을 어떻게 조직했는지를 보여주는 문화적 실천이었다.
      그들은 훈련으로 몸을 만들었고, 화장으로 의례를 구현했으며, 춤과 음악으로 조선의 질서를 연출했다.
      이러한 존재를 단순한 ‘여장’이나 ‘기이한 인물’로 치부하는 것은 조선 후기 궁중 문화를 오독하는 것이다.

      그들의 하루는 말 그대로 무대 위의 하루였고, 예술이자 정치였으며,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조선적 젠더 퍼포먼스의 상징이었다.

      기록 밖의 역사, 사내기생은 어떻게 살았을까

      3. 장악원의 조직과 사내기생의 역할

      조선 시대 장악원(掌樂院)은 단순한 예술 기관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가 예술을 통제하고, 권위와 질서를 시각·청각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만든 정치적 문화기관이었다. 그리고 사내기생은 바로 이 장악원의 공식 인력이었다.
      그들은 조선 궁중의 음악, 무용, 연회, 외교 행사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단순한 연기자도, 자유로운 예술가도 아니었다. 그들은 **왕실의 시선으로 규율된 ‘제도화된 예인’**이었다.

      장악원이란 무엇인가?

      장악원은 고려 시대부터 존재하던 음악기관이 조선에 들어서면서 체계화된 관청이다. 조선 초에는 예조(禮曹) 산하에 설치되었고, 왕실의 음악, 무용, 악기 제작, 연습, 공연을 총괄했다. 장악원은 크게 두 가지 기능을 수행했다.

      1. 의례 담당: 종묘제례악, 고종례, 왕의 즉위식 등 국가 의례의 음악과 무용을 준비.
      2. 연회 담당: 외국 사신 영접, 연등회, 궁중 연회 등의 예술 퍼포먼스 주관.

      이 조직은 수십 명의 전문 예인들로 구성되었고, 이 중 일부가 사내기생이었다. 여성 기생과는 구분되는 ‘사내기생’은 주로 정재 무용과 악기 연주를 맡았으며, 종종 무대 위에서 여성처럼 보이게 의도된 복식을 수행해야 했다.

      장악원 내부에서 사내기생의 위치

      장악원에는 다양한 직책이 있었다. 악사, 무동, 연희자, 창우 등이 각각의 역할을 맡았고, 이 중 ‘사내기생’은 정재(궁중무용)를 수행하는 무동 계열 중 정식 관청 교육을 이수한 예인이었다.
      그들의 지위는 천하지도, 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이들이 없으면 궁중 의례는 성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내기생은 다음과 같은 역할을 맡았다:

      • 정재 무용 수행: 왕과 왕비 앞에서, 또는 외국 사신을 접견할 때 예술적 ‘공식 인사’ 역할.
      • 의식용 음악 수행: 연주자로서 악기 담당. 특히 현악기나 타악기 중심.
      • 복식과 동작 규범화: 외형은 여성, 역할은 남성이라는 중간적 위치. 시각적 효과를 위해 미적으로 구성된 움직임 수행.
      • 훈련 조교: 경험 많은 사내기생은 후배의 화장법, 몸짓, 동작까지 전수하며 장악원의 예술 전통을 유지.

      공식 문서에도 등장한 사내기생

      《승정원일기》나 《국조보감》 등의 왕실 문서에 사내기생이 직접 언급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장악원과 관련된 문헌을 통해 그들이 국가적 행사에서 필수 인력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연등회, 팔관회, 또는 중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사내기생들이 출연한 정재가 몇 가지나 있었는지, 어떤 복장을 착용했는지까지 세부적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는 그들이 일회성 공연자가 아니라, 조선 왕조가 관리한 공연예술 체계의 한 축이었음을 증명한다.
      즉, ‘사내기생’은 그저 특이한 존재가 아니라, ‘공식적이고 기능적인 필요에 의해 창출된 제도적 존재’였던 것이다.

      사내기생의 존재가 가진 문화적 함의

      장악원이라는 국가기관 안에서 활동한 사내기생은 조선이라는 유교국가가 예술적 표현을 위해 젠더의 경계를 유연하게 해석했던 유일한 공간을 상징한다.
      그들의 존재는 한편으로는 전통의 보존자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 역할에 대한 예외적 허용을 말해준다.

      • 그들이 있어야 예술이 완성되었고,
      • 그들이 있어야 왕의 권위가 더욱 빛났으며,
      • 그들이 있어야 조선의 문화가 외국에 전달될 수 있었다.

      사내기생은 장악원의 한 파트가 아닌, 조선 궁중 예술의 시각적·문화적 완성도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4. 사내기생의 삶은 천했는가, 존귀했는가

      사내기생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모순된 위치에 서 있었다. 궁중에서 예식을 책임지는 예인으로서의 존귀함과, 동시에 ‘기생’이라는 호칭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편견과 천대가 공존했다. 이들은 왕 앞에서 정재를 추며 나라의 품격을 상징하는 인물이었으나, 무대에서 내려오면 ‘여장한 남자’, 혹은 ‘도덕적 불편함을 안기는 존재’로 경계받았다. 이러한 이중적 삶의 구조는 사내기생이 조선 사회에서 얼마나 독특하고 복잡한 존재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궁중에서는 ‘예인’, 거리에서는 ‘기이한 존재’

      사내기생은 장악원의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국가 공인 예인이었다. 그들은 왕이 참석하는 행사에서 정재를 선보이고, 외국 사신이 방문하면 조선 문화의 정수를 퍼포먼스로 보여주는 핵심 인력이었다.
      그들이 등장하지 않으면 의례는 불완전했고, 왕의 위엄은 완성되지 않았다. 이처럼 사내기생은 공식적으로 ‘국가의 얼굴’을 연기한 존재였다.

      하지만 사회 일반은 이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 ‘기생’이라는 명칭 자체가 유흥업 종사자와 혼동되었고,
      • 남성임에도 여성 복장을 하고 여성의 몸짓을 따라 한다는 점이 유교적 남성 규범에 위배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궁중에서 ‘높은 자리를 위한 도구’로는 환영받았지만, 사회적으로는 **‘불편한 존재’,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신분은 낮고, 기능은 높았던 이중성

      사내기생은 출신 성분상 천민 계급에 가까웠다. 기생이라는 직업 자체가 양반의 반열에는 들 수 없는 직능이었고, 이 때문에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예술적 재능이 탁월해도 사회적 상승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들은 조선 최고의 교육 기관인 장악원에서 훈련을 받았고, 궁중에서 왕과 신하들의 바로 앞에서 공연을 펼치는 문화적 상징이기도 했다.

      이 모순은 사내기생의 삶 자체에 스며들어 있었다.

      • 궁에서는 존중받고 예우를 받지만,
      • 문 밖으로 나가면 조롱과 의심, 도덕적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들은 명확한 자리를 가지지 못한 채, 존재하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이중 세계를 살아야 했다.

      예술은 존귀했으나, 삶은 제한되었다

      예술적 능력만 놓고 보면, 사내기생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궁중 무용은 단순한 춤이 아니라, 국가 질서의 시각적 상징이었다. 손끝 하나, 발끝 하나에 깃든 움직임은 수십 년의 훈련과 감각, 집중력이 필요했다. 또한 음악과 무용뿐 아니라 문학, 예절, 악기 연주 등 복합적 예술 감각을 갖춘 사람들만이 사내기생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전문성에도 불구하고, 사내기생은 신분 상승이나 직위 전환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 평생을 궁 안에서 보내고,
      • 사회적 명예도 없으며,
      • 죽어서도 역사서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사내기생의 삶은 **‘존귀한 기능을 가진 천한 존재’**라는 딜레마에 갇혀 있었다.

      사내기생을 보는 오늘날의 시선

      오늘날 우리는 과거를 단순한 위계나 질서로만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속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존재들,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의 삶에 주목하고, 그들의 존재 의미를 재조명하려는 노력이 커지고 있다.

      사내기생은 조선의 위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구조 속에서, 성 역할을 확장하며 예술을 구현한 존재였다.
      그들이 천했는가, 존귀했는가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다. 그들은 둘 다였고, 둘 다 아니었으며, 그 경계에서 살아간 조선 예술의 기형적이지만 불가결한 상징이었다.

      5. 유교 사회의 시선 – 인정과 거부 사이

      조선은 철저한 유교 국가였다. 유교는 인간 관계와 사회 질서를 명확한 위계 속에 두고, 남성과 여성의 역할도 철저하게 구분 지었다. 이런 사회 속에서 ‘남성이지만 여성의 복장을 하고 여성의 춤과 몸짓을 하는’ 사내기생은 제도적으로는 필요했지만, 이념적으로는 모순적인 존재였다. 이 독특한 위치는 유교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동시에 배척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유교의 기본 질서와 젠더 규범

      유교 사상은 ‘삼강오륜(三綱五倫)’과 같은 도덕적 교리를 통해 사회를 조직했다.

      •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집안을 지켜야 하며
      • 남녀 간의 행동, 복장, 역할은 명확히 나뉘어야 한다는 관념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조선 후기 성리학의 강화는 이러한 규범을 더욱 엄격하게 만들었고, 젠더의 혼용이나 유연성은 거의 용납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내기생은 말 그대로 ‘질서 밖의 질서를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는 궁중 예술의 담당자였지만, 민간의 시선으로는 금기를 깨는 존재, 혹은 도덕적 경계선상에 있는 인물로 인식되었다.

      제도는 받아들였고, 민심은 불편해했다

      흥미로운 점은, 사내기생은 국가가 조직한 장악원에 소속된 **‘공식 인력’**이었다는 것이다.
      왕조는 그들의 필요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중요한 의례에는 빠짐없이 이들을 참여시켰다.
      즉, 제도적으로는 이들의 존재가 인정되었고, 예술적 가치는 충분히 보상받았다.

      하지만 제도 밖에서는 달랐다.
      민간 사회에서의 사내기생은 불편한 존재였다.

      • 남자인데 여자로 보이고,
      • 여자처럼 행동하는 모습이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시선,
      • 성 역할의 규범을 깨뜨린다는 불쾌감이 함께 작동했다.

      이는 후대의 민담이나 야담에서 ‘기이한 인물’로 등장하는 사내기생의 묘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종종 도덕적으로 비난받거나, 희화화되거나, 때로는 신비롭고 위험한 존재로 그려졌다.
      이는 사내기생이 단순히 예술의 담당자 이상으로, 사회 윤리와 젠더 규범의 시험대에 올랐던 존재임을 의미한다.

      인정과 거부의 경계선에서

      사내기생의 삶은 한마디로 ‘인정받되 받아들여지지 못한 삶’이었다.
      왕 앞에서는 그들의 예술이 찬사를 받았지만, 연회를 벗어나면 그들의 존재는 사회가 감당하기 힘든 ‘불편한 진실’이 되었다.

      • 이들은 국가 예술의 전통을 이었지만,
      • 사회는 그들을 역사 속에 오래 기억하지 않았다.

      이 이중성은 조선 유교 사회의 모순을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문화와 권위 유지를 위해 젠더의 유연성을 실용적으로 허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기록에서도 배제했다.

      오늘날의 의미: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다

      오늘날 우리는 사내기생을 통해 유교 사회의 젠더 관념이 얼마나 복잡하고 실용적이었는지,
      그리고 그 이면에 어떤 억압과 부정, 필요와 배제가 있었는지를 다시 볼 수 있다.

      사내기생은 단지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라,
      유교 사회가 자신의 원칙을 유예하면서까지 유지한 문화의 본질적 모순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그들의 삶을 조명하는 일은, 단지 한 명의 역사적 인물을 되살리는 것을 넘어,
      과거의 권력과 젠더, 예술과 윤리의 경계를 다시 묻는 일이 된다.

      6. 풍속화에 남은 사내기생의 흔적들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당대의 삶을 가장 생생하게 담은 시각 기록물이다. 글로는 남기기 꺼렸던 사회의 뒷모습, 금기와 욕망, 유희와 예술이 풍속화 속에 은유적으로 담겨 있다. 특히 신윤복, 김홍도 같은 대가들의 화폭에는 ‘기생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다른’ 존재들이 등장하는데, 이 인물들이 바로 사내기생의 흔적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화폭 속에서 은근히, 그러나 분명히 존재감을 드러낸다. 풍속화는 말하자면, 기록되지 못한 존재들을 시각적으로 복원해낸 또 하나의 역사서다.

      풍속화란 무엇인가?

      풍속화는 조선 후기 민간의 생활, 유흥, 노동, 예술을 그린 그림이다.
      그 내용은 계층을 초월하고 성 역할의 경계를 넘나든다.
      왕실을 위한 공식 기록이 아니었기 때문에,

      • 더 자유롭고,
      • 더 사실적이며,
      • 더 은유적이었다.

      특히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은 유흥의 장면, 공연의 장면, 기생의 존재를 자주 묘사한다. 그런데 이들 중 일부 인물은 유독 여성으로 보이면서도 남성처럼 앉거나, 시선의 흐름이 다르거나, 체형이 두드러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 미묘한 표현의 차이는 바로 사내기생을 그린 흔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여성이 아닌 ‘여성처럼 꾸며진 인물’

      사내기생은 외형적으로는 여성과 같았지만, 관찰력이 예리한 화가는 그 차이를 놓치지 않았다.
      신윤복의 〈미인도〉나 〈청금상련도〉를 보면,

      • 얼굴이 지나치게 단정하고,
      • 손동작이 기계적이며,
      • 시선이 정적인 인물이 종종 등장한다.

      이런 표현은 의도적으로 ‘비정상적인 여성성’을 암시한 것으로 해석된다.
      즉, 보는 사람에게 ‘이 인물은 진짜 여성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적 장치는 사내기생이라는 존재를 직접 말하지 않고도 표현하는 방식,
      즉, 유교 윤리를 피해가면서도 존재를 남기는 풍속화의 은유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무대 장면에서 찾는 젠더의 흔적

      김홍도의 연희도(演戱圖)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보인다.
      악공들과 무희들이 나오는 장면 중 일부 인물은

      • 머리에 족두리를 쓰지 않았거나,
      • 몸의 선이 지나치게 직선적이며,
      • 남성적 골격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이는 남성 예인이 여성의 복장을 하고 무대에 선,
      사내기생의 퍼포먼스를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그림 속 인물들이 수행하는 정재는

      • 단순한 유흥이 아닌 궁중 의례의 일환이며,
      • 이는 장악원 소속 사내기생의 대표적인 활동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풍속화는 단지 오락 장면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권력, 젠더, 문화적 실천을 동시에 기록한 복합적 문서로 읽힌다.

      풍속화 속 사내기생, 왜 중요한가?

      기록으로 남지 못한 존재들을 복원하는 데 있어, 풍속화는 가장 중요한 시각 사료다.

      • 역사책이 지운 존재,
      • 문헌이 침묵한 존재들이
        그림 속에서 은밀하게, 그러나 또렷하게 등장한다.

      이러한 그림들은

      • 조선 사회가 젠더 유연성을 완전히 억압하지는 않았으며,
      •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를 허용하고, 표현하고, 숨기기도 했다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풍속화는 말하자면 사내기생의 마지막 흔적이자, 시각적 저항의 방식이기도 했다.

      7. 현대 젠더 시선으로 다시 읽는 사내기생

      21세기 우리는 성별을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으로만 보지 않는다. 젠더는 생물학적 성별을 넘어서,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수행되는 정체성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현대적 시선은 조선 시대 ‘사내기생’이라는 존재를 단순히 ‘여장남자’로 축소하지 않고, 오히려 젠더 수행의 한 형태, 권력과 예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생한 역사적 실천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지금 우리가 사내기생을 다시 들여다보는 이유는 바로 그 안에 우리 시대가 던지는 젠더 질문의 원형이 있기 때문이다.

      젠더는 ‘정체성’이 아닌 ‘퍼포먼스’일 수도 있다

      현대 젠더 이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 중 한 명인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젠더를 ‘수행적(performance)’이라고 말한다.
      즉, 남성성과 여성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에 따라 반복되는 행동과 표현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내기생은 남성의 몸을 지녔지만,

      • 여성의 옷을 입고,
      • 여성의 화장을 하고,
      • 여성의 몸짓을 훈련받고,
      • 무대 위에서 여성의 정체성을 연기했다.

      하지만 그 연기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었다.
      국가 의례와 예술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사내기생은 자신만의 젠더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혹은 ‘둘 다인’ 존재로서,
      조선이라는 유교 사회가 허용한 드문 젠더 수행의 공간을 차지했다.

      ‘기생’이라는 단어의 프레임 벗어나기

      ‘기생’이라는 말은 오늘날 유흥업종과 연결되며 부정적 뉘앙스를 동반한다.
      하지만 사내기생은 장악원 소속의 공식 예인으로서,
      그들의 본질은 ‘기생’보다는 **‘퍼포머’ 또는 ‘아티스트’**에 가까웠다.

      우리가 그들을 ‘여장남자’, ‘기생’으로 한정지을 때
      그들의 삶과 예술, 사회적 맥락은 누락되기 쉽다.
      현대의 젠더 논의 속에서 이들을 복원하는 작업은
      단어 너머의 맥락을 읽고, 존재의 층위를 새롭게 구성하는 일이다.

      사내기생은 성소수자였을까?

      이 질문은 민감하면서도 중요하다.
      사내기생이 동성애자였는지, 트랜스젠더였는지,
      혹은 단지 남성 예인이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의 젠더 표현이 당시 사회 질서와는 다르게 작동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남성이지만 여성의 역할을 공식적으로 수행했고,
      사회는 이를 불편해하면서도 필요로 했다.

      이는 오늘날 성소수자들이 겪는 현실과 유사하다.

      • 존재는 인정되지만,
      • 정체성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
        그런 점에서 사내기생은 조선 시대의 ‘성적 소수자적 위치’를 경험한 존재로 읽을 수 있다.

      사내기생을 다시 보는 것, 현재를 읽는 일

      우리가 사내기생을 다시 읽는 이유는 단지 ‘희귀한 역사 인물’을 조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존재는 지금 우리가 마주한 젠더·정체성·차별 문제를 돌아보게 만든다.

      • 성별이 바뀌지 않아도 역할이 바뀔 수 있고,
      • 제도 속에서 젠더 유연성이 발생할 수 있으며,
      • 예술은 그 경계를 넘어설 수 있음을
        그들은 몸으로 증명했다.

      사내기생은 조선 시대의 예술가이자, 젠더 경계의 탐험자였다.
      그들의 삶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들은 오늘날의 젠더 담론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