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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조선 시대 궁중에서 활동했던 남성 기생, 즉 ‘사내기생’은 춤과 노래, 문학에 능한 예인이자 정재(呈才)의 주체로 왕실 행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존재를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사내기생은 동성애와 관계가 있었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서, 조선 사회의 성 문화, 젠더 역할, 궁중 권력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1. 사내기생이 활동한 무대: 궁중과 장악원
사내기생은 단순히 ‘남성 기생’으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조선의 궁중 예술과 국가 의례를 떠받치던 실질적 전문 예술가 집단이었다. 이들이 등장한 무대는 기방이 아닌, 철저히 국가 운영 체계 속에서 마련된 공적 무대였으며, 그 핵심은 바로 ‘궁중’과 ‘장악원’이라는 두 공간이었다.
궁중은 예술이 정치가 되던 공간이었다
조선 왕조의 궁중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국가 권력과 권위, 의례와 외교, 문예와 상징이 맞물리는 공간이었다. 왕의 권위를 강화하고, 외국 사신에게 조선의 품격을 보여주는 장치로서 궁중에서 행해지는 연회는 매우 중요했고, 이 연회의 정중앙에 ‘정재(呈才)’라 불리는 궁중무용이 있었다.
정재는 민속 무용과는 구분되는 엄격한 형식과 의미를 지닌 퍼포먼스로, 단순한 예술적 표현이 아니라 정치적 메시지를 내포한 의례적 공연이었다. 사내기생은 이러한 무대에서 왕과 신하, 외국 사절의 앞에서 정제된 춤과 노래, 악기를 연주하며 국가와 왕권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적 행위자였다.
즉, 이들이 선 무대는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라, 정치 권력의 연장이자 국가 정신의 구현 공간이었다.
장악원은 예술인을 양성하는 ‘국립 예술학교’였다
사내기생이 소속되었던 장악원은 오늘날로 치면 국립 예술 교육기관이자 궁중 전속 예술인 관리소였다. 조선은 국가 차원에서 예인을 체계적으로 선발하고 교육하는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이를 담당한 기관이 바로 장악원이다.
장악원은 단순히 악사와 무용수를 관리하는 수준을 넘어, 각종 연희 기록의 정리, 악보 제작, 악기 보존 및 제작, 공연 기획까지 관장했다. 이곳에서 사내기생은 음악, 무용, 발성, 시문(詩文)까지 포괄하는 고난도의 훈련을 받았으며, 이는 단순한 접대가 아닌 고급 예술인의 양성을 의미했다.
실제로 장악원의 교육 체계는 10세 전후의 아동을 선발해 수년간 혹독한 교육을 거쳐 궁중 예인으로 배출하는 구조였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조선의 국가의례를 실질적으로 지탱하는 중요한 인력이 되었다.
‘기방’과의 혼동은 후대의 오해일 뿐
많은 이들이 ‘기생’이라는 단어에 자동적으로 **기방(妓房, 접대업소)**을 연상하지만, 사내기생은 기방 출신이 아닌 국가에서 양성한 공공의 예인이었다. 기방의 기생이 주로 상류층 남성의 개인 연회나 유흥의 장에서 활동했다면, 사내기생은 오직 궁중 연회, 국가 의례, 외교 행사 등 공적 공간에서만 활동했다는 점에서 그 정체성은 명확히 구분된다.
특히 여인 기생과 달리, 사내기생은 궁중 정재의 ‘의례적 무대’를 책임진 퍼포머였기에 성적 대상화보다는 상징적·예술적 존재로 인식되어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이들이 ‘남자 기생’으로 불리며 오해받은 것은, 젠더 표현의 유연함과 사회의 이분법적 시각이 충돌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사내기생이 활동한 무대는 철저히 정치적이고 제의적인 국가의 공간이었다. 장악원이라는 시스템 속에서 예인으로 훈련되고, 궁중이라는 상징 공간에서 퍼포먼스를 통해 조선을 대표한 이들은 단순한 기생이 아니었다. 그들의 무대는 곧 조선이라는 나라의 얼굴이었으며, 그 예술은 권력의 언어였고, 그 존재는 기록되지 않은 국가의 또 다른 축이었다.
2. 조선 사회의 동성애 인식, 그리고 실상
조선 사회는 유교 윤리에 바탕을 둔 가부장적 질서와 도덕 중심의 문화가 뿌리내린 국가였지만, 그 안에서도 동성애는 완전히 배제된 금기사항은 아니었다. 오히려 수면 아래 다양한 형태의 동성 간 애정, 욕망, 관계들이 존재했고, 이를 암시하거나 조명한 기록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조선의 동성애는 단지 성적 지향의 문제를 넘어서, 계층, 권력, 문화, 젠더 인식과 복합적으로 얽힌 하나의 사회적 실체였다.
금기는 곧 존재의 반증이었다
조선의 유교 이념은 분명히 남녀간의 결혼, 자손 번식을 이상적인 삶의 질서로 삼았다.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부유별(夫婦有別)’ 같은 관계 윤리는 개인의 정체성과 행동을 규제하는 기준이었다. 그렇기에 동성 간 관계는 공식적인 윤리 질서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일탈’**이었다.
그러나 ‘억제’하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은 그러한 관계들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예를 들어, 《성종실록》에는 남색 풍습에 대한 탄핵 기록이 나오고, 《승정원일기》에도 남색을 금지하는 지침이 등장한다. 이러한 문헌들은 동성애가 ‘사회적으로 문제시될 만큼’ 빈번했음을 의미한다.
남색(男色), 문화와 사치의 일부로 존재하다
특히 양반 사회에서는 남색이 일종의 문화적 유희 혹은 취향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조선 초~중기에는 젊고 용모가 아름다운 소년을 곁에 두는 행위가 일종의 사치 혹은 교양처럼 간주되기도 했으며, 이는 중국 명나라의 문화적 영향 아래 유입된 현상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일부 문인들은 시문(詩文)에서 소년의 외모나 목소리를 묘사하는 구절을 남겼고,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미동(美童)’을 후원하거나 길러 예인으로 키우는 행위도 있었다. 물론 이것이 모두 동성애 관계로 이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동성 간의 감정과 관심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요소로 충분하다.
동성애에 대한 인식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조선 초기에는 비교적 동성애적 분위기가 관대했으나, 중기 이후 유교 윤리가 강화되며 점차 억압되기 시작했다. 성리학의 정착과 더불어 성별 이분법과 가부장 질서가 강화되면서, 동성애는 죄악시되거나 ‘불온한 기호’로 간주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사대부들의 행동에도 엄격한 도덕 기준이 적용되었고, 동성 간의 밀접한 관계는 **사문난적(斯文亂賊, 유교 문화를 어지럽히는 자)**으로 비판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적 공간에서의 감정, 관계, 애정은 완전히 소거되지 않았고, 다양한 기록의 틈새에 그 존재가 스며 있다.
기록되지 않은 개인의 삶, 사내기생과 교차하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내기생이라는 존재는 동성애의 현실과 상상 사이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예술이라는 무대 위에서 여성적 젠더를 구현한 남성 예인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는 ‘젠더 경계의 수행자’였다.
이들이 궁중에서 왕이나 고관대작 앞에서 공연을 하거나 술을 따를 때, 단순히 의례를 수행한 것인지, 혹은 정치적 권력자와 은밀한 관계까지 맺었는지는 기록으로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사내기생을 둘러싼 은유적 기록이나, 일부 연회의 비사 속에는 동성 간의 친밀함을 암시하는 정황이 수없이 등장한다.
동성애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록되지 않았다
조선 시대는 성적 다양성을 공공의 질서 속에서 억누르려 했지만, 인간의 감정과 관계는 규범의 테두리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았다. 사내기생을 둘러싼 젠더 표현과 동성 간의 긴장은, 단지 오늘날의 ‘성소수자’ 개념을 역사에 투영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도 실제 존재했던 성적·감정적 복합성의 흔적을 재발견하는 일이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그들은 정말 존재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보이지 않게 만들어졌던 것인가?
3. 사내기생, 왜 동성애적 상상과 연결되는가?
사내기생은 조선 시대 궁중에서 활동한 남성 예인으로, 여성의 복식과 몸짓, 화장과 말투를 익혀 의례 무대를 장식했다. 이들의 정체성은 남성이면서 여성의 역할을 연기한 경계적 존재였기에, 후대 사람들에게도 계속해서 혼란을 주었고, 때로는 ‘동성애적 상상’과 직결되어 왔다. 단지 성 정체성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 기록 방식, 예술적 표현의 결합이 그러한 인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여성성을 수행한 남성, 젠더 코드의 뒤섞임
사내기생은 단순히 여성의 옷을 입은 남성이 아니었다. 그들은 궁중 무대에서 여성의 태도와 정재(呈才)의 섬세한 움직임, 눈짓과 손짓, 걸음걸이까지 철저히 수행한 예술인이었다. 이 과정에서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시각적으로 여성으로 인식되는 일이 많았고, 이는 당대나 후대의 시선에서 혼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유교적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역할은 명확히 구분되어야 했다. 그런데 국가가 공적으로 여성적 퍼포먼스를 수행하게 한 남성 예인을 길렀다는 점은 사회적 위선과 욕망이 교차된 모순적인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바로 그 틈에서 ‘동성 간 감정이나 관계도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이 생겨난다.
예술과 성의 경계, 조선의 모호한 이면
사내기생은 ‘춤추는 남자’였지만, 그 춤은 곧 ‘여성처럼’ 춰야 하는 것이었다. 정재는 여성성을 상징하는 우아한 몸짓, 절제된 감정, 느린 움직임으로 구성됐으며, 이를 익힌 남성이 궁중에서 공연을 펼칠 때 관객은 두 가지 인식을 동시에 가지게 된다: “그는 남자인가?” “그는 여자인가?”
이러한 모호함은 예술의 힘이자 동시에 성적 긴장을 유발하는 장치였다. 특히 궁중 연회라는 폐쇄적 공간에서 고위 권력자들이 이들을 지켜봤다는 사실은, 사회적 권력과 성적 암시가 교차하는 서사를 만든다. 따라서 사내기생의 존재는 단순히 ‘남자 기생’이라는 범주로 설명되기보다, 젠더 수행과 권력적 응시가 얽힌 문화적 상징체로 봐야 한다.
기록의 방식과 후대의 오독
문제는, 이들에 대한 공식 기록이 ‘기생’, ‘예인’, ‘장악원 악공’ 등으로 혼용되었고, 이름조차 명확히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명 대신 역할이나 소속만 기록된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누가 어떤 인물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이는 후대 해석자들에게 상상의 여지를 남기게 했고, 사내기생을 동성애자 혹은 트랜스젠더로 해석하려는 경향까지 만들어냈다.
특히 20세기 이후 성 소수자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과거의 ‘성적 경계인’은 현대 개념에 맞춰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사내기생도 ‘조선의 동성애 문화의 상징’ 혹은 ‘조선의 젠더 플루이드’ 아이콘으로 소환되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이 실제로 동성애자였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그들이 왜 그런 시선의 대상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인식이 어떤 사회적 맥락과 필요에 의해 발생했는지를 탐구하는 일이다.
사내기생은 거울이었다
사내기생은 조선이라는 시대가 감추고 싶었던 욕망과 동시에 공공연히 사용했던 예술 장치였다. 그들의 존재는 사회가 허용한 ‘예외’였고, 그 예외가 곧 욕망의 거울이 되었다. 동성애적 상상은 그들을 둘러싼 시선과 권력 구조, 젠더 규범의 경계를 흔드는 방식으로 작동했으며, 그 자체로 조선 사회의 복잡성과 이중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4. 동성애는 금기였을까, 공적 담론의 바깥이었을까?
조선 시대의 동성애를 다루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쟁점은 바로 이것이다. "동성애는 조선 사회에서 엄격히 금지된 것이었는가, 아니면 단지 공식 언어로 말해지지 않았을 뿐인가?" 이는 사내기생을 비롯한 남성 예술가들의 존재와도 깊이 연결되며, 젠더와 성에 대한 당시 사회의 경계 설정을 드러낸다.
유교 윤리가 만든 ‘이데올로기적 금기’
조선은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나라였다. 성리학은 부계 중심 사회를 정당화하고, 남녀간 질서와 도덕을 강조하며, 특히 자손 번식을 위한 남녀간 성관계 외의 모든 성적 행위는 ‘도리에 어긋난 것’으로 규정했다. 동성애 역시 이 틀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배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배제는 단지 윤리적인 주장만이 아니라, 사회 체제 유지에 대한 전략적 판단이기도 했다. 사대부 계층이 가문을 잇고 조정을 장악하는 데 있어 동성애는 장애물로 간주되었고, 이에 따라 동성애는 공적으로 부정되고 검열되는 대상이 되었다.
검열은 존재의 반증이다
하지만 그 검열의 존재 자체가 곧 동성애가 완전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암시한다. 《성종실록》, 《중종실록》 등의 조선왕조실록에선 **“남색 풍습이 번성하니 폐단이 심하다”**는 언급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조정에서 이를 근절하라는 지시가 내려진다.
만약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반복적으로 탄핵하거나 금지령을 내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조선 사회는 공적인 자리에서 동성애를 논하지 않음으로써 침묵을 유지했고, 그 침묵 속에 실존했던 감정과 관계들이 숨어 있었다.
문학, 민간 문화 속의 암시적 표현들
실제 조선 후기의 가사, 시조, 야담 등 민간 문학 속에는 남성 간의 애정이나 미소년에 대한 찬사가 간접적으로 표현된 경우가 종종 발견된다. 이는 공식적으로 동성애를 언급하는 것이 꺼려졌던 사회에서, 비공식적 매체를 통해 ‘말해지지 않은 감정’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일부 야담에서는 “어여쁜 동자를 아꼈다”, “미모가 뛰어나 궁중에서 인기를 끌었다”는 식의 표현이 나오는데, 이들은 명확한 동성애 표현은 아니지만, 남성 간의 특수한 관계를 암시한다.
사내기생은 공공의 시선 속 ‘모호한 존재’
사내기생은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여성의 몸짓과 감성을 수행하면서도 남성의 신분을 유지하는 이중적 존재였다. 이들이 젠더 경계에 위치한 만큼, 그들을 향한 시선도 명확히 정의되지 못하고 “기이하지만 궁금한 존재”로 남게 된다.
동성애가 공식적으로 말해질 수 없었던 조선 사회에서, 사내기생은 일종의 **“침묵 속에서 허용된 젠더 퍼포먼스”**였으며, 동성 간 욕망의 기호가 될 수 있는 상징적 매개체였다.
조선의 동성애는 금기였지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조선에서 동성애는 법적, 윤리적으로는 분명히 금기였지만, 현실 속 인간 관계와 감정에서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다. 그것은 단지 말해지지 않았고, 기록되지 않았으며, 숨겨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 ‘말해지지 않음’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더 많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사내기생이 지닌 젠더 수행의 성격과 당시의 사회 규범 사이에서, 조선의 동성애는 한 개인의 성적 지향을 넘어서는 사회 구조적·문화적 코드로 작동했다.
5. 오늘날의 해석: 사내기생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환
사내기생에 대한 오늘날의 해석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을 되짚는 차원을 넘어선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 조선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성과 젠더, 권력과 예술을 구성했는지를 다시 묻는다. 특히 현대의 젠더 감수성과 소수자 인권 의식의 변화 속에서, 사내기생은 더 이상 기이하거나 낯선 존재가 아니라, **당시 사회 구조 속에서 복잡한 경계를 넘나든 ‘역사적 증언자’**로 주목받고 있다.
‘기이한 존재’에서 ‘문화적 수행자’로
과거에는 사내기생을 두고 ‘왜 남자가 여장하고 춤을 추었는가?’라는 질문이 중심이었다. 이는 현대적 시선에서 성 역할에 대한 이분법적 고정관념이 투영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묻는다. ‘왜 국가가 여성적 역할을 남성에게 요구했는가?’, ‘그들은 어떤 문화적 기능을 수행했는가?’
이러한 시선의 전환은 사내기생을 단순히 ‘동성애적 상상’이나 ‘이색적인 인물’로 소비하지 않고, 그들이 공식 문화 체계 속에서 수행했던 역할, 구조 속에서 허용되었던 젠더 유연성, 그리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감춰졌던 경계의 혼종성을 조명하게 한다.
퀴어 관점에서 본 사내기생: 젠더 수행의 고유한 사례
현대 퀴어 이론에서는 젠더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수행되는 것(performance)’**으로 이해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사내기생은 단순히 여성 흉내를 내는 존재가 아니라, 국가 주도 하에 젠더를 훈련받고, 수행하고, 상징하는 체계적 기획의 일부였다.
그들은 단순한 무용수나 가무 인력이 아닌, 조선 시대 궁중에서 예술적 감성과 성적 코드, 젠더적 유연성을 동시에 요구받았던 존재였으며, 이들이 수행한 여성성은 ‘흉내’가 아니라 사회가 용인한 하나의 문화 퍼포먼스였다.
정체성의 모호함이 보여주는 사회의 진짜 얼굴
사내기생은 역사에서 이름이 자주 지워졌고, 기록에서는 소속이나 역할만 남았다. 이는 조선이 그들의 존재를 필요로 하면서도, 도덕적으로는 불편해했던 모순적 감정의 반영이다. 현대의 시선으로 볼 때 이 기록의 공백은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정체성을 억압하거나 배제하려는 문화적 침묵의 결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침묵을 들여다보는 일이 오늘날의 역사 복원에서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름이 지워진 존재들, 젠더의 경계에서 흔들리던 사람들을 다시 불러내는 것은 단지 과거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 우리의 인식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성찰하기 위해서다.
사내기생, ‘되찾아야 할 문화적 목소리’
오늘날 사내기생에 대한 연구와 재해석은 단지 역사의 흥밋거리를 찾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조선이라는 체제에서 젠더, 예술, 권력, 감성의 교차점에 서 있었던 인물들이다. 그들의 존재를 다시 바라보는 것은 결국,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지를 되묻는 일이기도 하다.
사내기생은 더 이상 경계 밖의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 경계 위에서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자,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문화적 증언자다.
사내기생과 동성애, 단정보다 ‘다층적 해석’이 필요하다
사내기생이라는 존재를 바라보며 우리는 흔히 단순한 이분법에 빠지기 쉽다. “동성애적 존재인가 아닌가”, “여자처럼 행동한 남자인가 아니면 단순한 연희인인가”와 같은 이분법은 실제 조선 시대의 복합적인 문화 맥락을 놓치게 만든다. 사내기생은 단순히 성적 지향의 코드로만 해석되기에는 지나치게 복합적인 위치에 존재했다. 이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보다 다층적인 해석과 접근이 필요하다.
단순한 성적 관점은 사내기생의 본질을 놓친다
사내기생의 존재가 동성애와 연결되는 이유는 그들이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수행하며, 궁중이라는 공식 무대에서 왕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곧 동성 간의 성적 관계를 의미한다고 단정짓는 것은 역사적 상황과 구조, 제도의 맥락을 무시하는 단순화된 판단이다.
예를 들어, 장악원의 예인으로 훈련받은 사내기생은 무용, 음악, 시문까지 아우르는 국가의 예술 인재였으며, 그 존재의 목적은 예술적 기능 수행에 있었다. 이들이 수행한 젠더 표현은 관객의 감흥을 이끌어내는 ‘문화적 연출’이자 ‘공적 서비스’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성적 함의가 존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니었다.
예술, 젠더, 권력이 교차한 지점에 있던 사내기생
사내기생을 통해 조선은 ‘남성만의 세계’로 보이는 유교 사회에서도 젠더의 유연성을 제도적으로 허용한 공간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들은 단지 성적 대상이 아니라, 예술을 통해 사회적 질서를 지탱한 이중적 존재였다.
궁중에서의 퍼포먼스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국가 의례의 일부였고, 사내기생의 무용과 노래는 왕권을 상징하고 의전을 완성하는 기능을 했다. 그들이 표현한 여성성은 사적 욕망이 아니라 공적 권위와 연결된 상징체계였다는 점에서, 단순히 성소수자 코드로만 이해하는 것은 축소된 해석이다.
동성애라는 개념 자체가 시대와 맥락에 따라 다르다
‘동성애’라는 단어는 근대 이후 생겨난 개념으로, 조선 시대에는 이에 해당하는 동일한 인식 체계나 명명법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시대에는 지금처럼 개인의 성적 지향을 구분하여 정체성을 부여하는 문화가 없었으며, 관계성이나 행위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관점으로 조선의 사내기생을 동성애자라고 단정하는 것은 역사적 맥락을 탈각시킨 해석이며, 당시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분류 체계를 강제로 끼워 맞추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사내기생은 조선이라는 고유한 체제 속에서 ‘다르게 작동하는 성과 젠더의 코드’로 존재했음을 인식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건 규정이 아닌 ‘복원’이다
사내기생을 동성애자, 성소수자, 연희인, 혹은 궁중 예인 중 무엇으로 부르든,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기록에서 지워졌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시선으로 그들을 다시 복원할 것인지에 있다. 단정적인 해석보다 필요한 것은 교차적이고 복합적인 접근 방식, 즉 다층적 해석이다.
우리는 사내기생을 통해 조선 사회의 성 이데올로기, 젠더 수행, 문화 권력, 예술 제도의 면면을 동시에 읽을 수 있으며, 이 모든 것은 오늘날 젠더 다양성과 문화사 복원 작업에 중요한 단서가 된다.
사내기생, 단일한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존재
사내기생은 단지 동성애의 코드, 성소수자의 사례로 환원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문화 예술, 젠더 정치, 왕실 권력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이동하며 살아갔던 **‘경계 위의 존재’이자 ‘문화적 목소리’**였다. 지금 우리는 그들의 복합적 위치를 이해하고, 다양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일에서 새로운 문화사 쓰기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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