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야의 조선시대 '사내기생'

조선 시대 ‘사내기생’

  • 2025. 6. 12.

    by. 유니야15

    목차

      궁중 예술의 설계자, 무대를 짓고 감정을 연출하다

      1. 궁중 의례와 공연의 구성

      조선시대의 궁중 공연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의 권위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정치적 질서를 문화적으로 공고히 하는 하나의 정치-의례적 장치였다. 국왕의 즉위식, 세자 책봉, 외국 사신 영접, 국가 경사 및 왕실 축하 행사 등, 주요 의례에서의 공연은 단순한 ‘공연’이 아닌 국가 주도의 공식 표현 수단이었고, 그 중심에는 장악원 소속의 사내기생들이 있었다.

      정재(呈才), 조선 궁중 무용의 핵심 포맷

      이러한 궁중 공연의 핵심 형식은 ‘정재’였다. 정재는 ‘재주를 바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단순한 예술 표현을 넘어 왕에게 바치는 상징적 헌정이었다. 각 정재는 일정한 주제와 감정선, 구성과 음악을 갖추었으며, 각종 의례의 성격에 맞게 치밀하게 기획되었다.

      예를 들어, 사신 영접 의례에는 조선의 문화적 세련됨과 풍요를 보여주는 내용이 삽입되었고, 왕실의 경사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상징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공연은 국가의 이미지 메이킹이자, 정치 외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수단이었다.

      공연 구성의 단계 – 철저한 형식미

      공연은 통상적으로 다음의 세 단계로 나뉘며, 각 단계마다 정해진 연출과 상징을 지녔다:

      • 서장(序章): 의례 시작을 알리는 도입부. 장중한 음악과 함께 등장하며, 대형을 갖추고 무대 위에 진입하는 장면에서부터 왕에 대한 존경과 질서의 미학이 드러났다.
      • 본장(本章): 무용과 음악, 가사와 시조를 결합해 본격적인 주제와 감정을 표현하는 부분. 사내기생들은 손끝, 발끝, 시선의 흐름을 조율하여 서사적 무용을 선보이며, 감정과 은유를 시각화했다.
      • 종장(終章): 연회의 마무리를 고하는 부드럽고 절제된 퇴장 장면. 공연의 정점을 넘긴 뒤, 다시 왕 앞에서 몸을 낮추며 물러나는 장면은 유교적 질서의 회복을 뜻했다.

      이러한 정형 구조는 단순히 미적 구성을 넘어서, 예술로 왕권과 국가의 질서를 가시화하는 일종의 정치적 언어로 기능했다.

      사내기생은 조선 궁중 예술 시스템의 엔진

      사내기생은 이 공연 전체를 지탱하는 핵심 존재였다. 단순히 무용수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연출 의도와 상징, 예절을 몸에 익힌 종합예술 인력이었다. 공연은 대체로 ‘궁중악사’와 협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으며, 사내기생은 악장과 무대 동선, 리듬 변화에 따라 자신의 움직임을 절도 있게 조절했다.

      이러한 공연 시스템은 단순한 감상의 영역을 넘어서, ‘공연=국가 이미지 구축 도구’로서 기능했다. 그리고 사내기생은 이 복잡한 설계 구조 속에서 조선 문화예술 체계의 정점에서 움직였던 존재였다.

      사내기생의 공연은 어떤 포맷이었나?

      2. 정재(呈才)의 형식과 의미

      조선시대 궁중에서 예술 공연은 단순한 즐길 거리가 아닌, 국왕과 조정, 사신과 백성에게 왕실의 품격과 유교적 질서를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상징적 도구였다. 이 가운데 핵심 공연 형식이자 사내기생의 주요 무대였던 것이 바로 **‘정재(呈才)’**다.

      정재란 무엇인가?

      ‘정재’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재능을 바친다’**는 의미다. 이는 단지 개인의 춤 솜씨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국왕에게 바치는 국가 예술의 집합체라는 뜻을 내포한다. 즉, 정재는 무용뿐 아니라 음악, 노래, 시문 낭송, 의상, 대형 연출까지 복합적으로 조율된 공연이었으며, 조선 왕조의 문화적 권위를 집약하는 시각적 언어였다.

      특히 왕의 생일, 외국 사신 접대, 경사스러운 국가 행사 등 중요한 의례에는 항상 정재가 포함되었으며, 사내기생은 여기에 출연하여 궁중 문화의 정수를 실현했다.

      정재의 구조 – 서사와 상징의 연출

      정재는 단순한 무용 공연과 달리, 정교한 구성을 갖추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3단 구성을 기본 틀로 삼았다:

      1. 초장(初章) – 도입부로, 등장과 인사, 무대 준비로 이루어진다. 무용수들은 장중한 음악에 맞춰 일정한 대형을 유지하며 등장하고, 국왕에게 예를 올리며 공연을 시작한다. 이때 이미 복식과 몸짓에서 유교 질서와 궁중 예절이 강조된다.
      2. 본장(本章) – 공연의 핵심 부분. 음악과 춤, 낭송이 어우러지며 공연의 서사적 주제와 감정선이 전개된다. ‘춘앵전’, ‘포구락’ 등 대표적인 정재에서는 자연의 순환, 왕의 덕망, 평화와 풍요 등 상징적 메시지를 춤과 가사로 표현했다.
      3. 종장(終章) – 마무리 장면. 무용수들은 절제된 동작으로 무대에서 물러나며 공연을 정리하고, 다시 왕에게 예를 올리며 퇴장한다. 이는 왕실의 품격과 조선 예술의 **규범성과 절도미(節度美)**를 상징한다.

      이러한 흐름은 공연이 단지 유희가 아니라, 왕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백성에게 안정을 전달하는 의례적 상징임을 보여준다.

      사내기생이 정재에서 맡은 역할

      사내기생은 이 정재에서 여성성을 연기하며, 동시에 고난도의 예술 퍼포먼스를 수행해야 했다. 예를 들어, 여성의 감정선을 표현하는 춤사위와 절제된 감성, 유려한 동작 등을 수행하면서도 궁중 악사와의 협업, 지정된 대형 수행, 시문 낭송까지 소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을 무대에 세우기 어려운 유교적 질서 속에서, 사내기생은 ‘예술적 대체자’로서 제도화된 존재였다. 단순히 남성 예인이 아니라, 국가가 훈련시킨 상징적 젠더 연기자이자, 궁중의 시각적 이상을 구현하는 무형문화의 핵심이었다.

      정재는 예술인가, 정치인가?

      결론적으로, 정재는 예술임과 동시에 정치였다. 국왕의 덕을 기리고, 조선의 이상적 질서를 공연으로 표현하는 행위였으며, 이를 수행한 사내기생은 조선의 문화 정체성과 정치 이데올로기를 예술로 구현한 주체였다.

      그들의 무대는 단순한 춤의 공간이 아니었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통치 철학과 예술 정신이 공존하는 상징적 장치였다.

      3. 남성의 몸으로 구현한 여성적 감정

      조선 궁중 무대 위에서 사내기생은 단순한 연희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남성의 신체로 여성의 정서와 감성을 표현하는 예술적 수행자였다. 이 독특한 역할은 단순한 성전환적 모방을 넘어서, 당대 사회가 예술과 성별, 감정 표현을 어떻게 제도화하고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남성의 신체로 표현한 여성적 ‘선(線)’의 미학

      조선 궁중 무용, 특히 정재에서 여성의 감정은 곡선적이고 유연한 동작을 통해 시각화되었다. 예컨대 슬픔은 낮은 자세와 구부러진 손끝으로, 기쁨은 가볍고 부드러운 몸놀림으로 표현되었다. 사내기생은 남성의 체형과 근력을 여성적 곡선으로 전환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 엄격한 훈련과 정서적 몰입, 젠더적 연기력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표현은 단순히 춤을 잘 춘다는 차원이 아니라, 남성으로서 '여성적 감정'을 예술적으로 해석하고 재현하는 능력을 의미했다. 손끝과 발끝, 고개를 숙이는 각도, 시선의 흐름까지 모두 ‘감정의 언어’였으며, 이는 훈련된 예인만이 구현할 수 있는 고난도 기술이었다.

      성별은 경계였는가, 무대 위의 확장이었는가?

      사내기생의 예술적 수행은 당대 유교 사회에서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남성이 여성처럼 행동하거나 꾸미는 것은 일반적 생활세계에서는 금기로 간주되었지만, 무대 위에서는 그것이 허용되고 심지어 장려되었다. 이는 조선이 예술이라는 공간에서는 성 역할의 유연성을 인정했음을 보여준다.

      사내기생이 구현한 여성성은 단지 성별을 흉내 내는 연극적 제스처가 아니라, 여성적 감정선에 대한 고차원적 예술적 접근이었다. 특히 슬픔, 그리움, 경외심, 기쁨 등의 감정은 성별을 넘어선 공감의 영역으로 확장되었으며, 이는 조선 무용이 지닌 감성적 깊이의 핵심이기도 했다.

      그들은 왜 여성처럼 ‘보이길’ 요구받았는가?

      당시 유교 질서는 여성을 공적 공간에서 배제했지만, 동시에 궁중 문화는 여성적 아름다움과 정서적 서정을 필요로 했다. 이 모순을 해결한 것이 바로 사내기생의 여성성 재현이었다. 그들은 성별은 남성이지만, ‘사회적으로 요구된 여성의 정서’를 안전하게 구현할 수 있는 존재로서 국가적으로 배치된 셈이다.

      그러므로 사내기생의 퍼포먼스는 젠더 전복이나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국가가 제도화한 젠더 퍼포먼스의 한 형태였으며, 그 안에는 복잡한 권력의 작동과 예술의 가능성이 교차하고 있었다.

      4. 음악과 동작의 정교한 연동

      조선 궁중 공연에서 무용과 음악은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정재(呈才) 같은 의례적 공연에서는 동작 하나하나가 음악의 박자, 음률, 정서와 밀접하게 맞물려야 했다. 사내기생은 단지 몸을 움직이는 연희자가 아니라, 악공들과 호흡하며 하나의 서사를 완성하는 종합 예술가였다.

      궁중 음악 ‘아악’과 무용의 동시성

      정재에서 사용된 음악은 대부분 ‘아악(雅樂)’으로, 중국 송나라에서 들여와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궁중의 전통 정악 시스템이다. 이 음악은 단순한 배경음이 아니라, 무용의 구조와 흐름을 결정하는 시간적 프레임이었다.

      예를 들어, ‘포구락’이나 ‘춘앵전’과 같은 정재에서는 음악의 박자와 무용수의 발 디딤, 손의 각도, 회전 시점까지 정확히 맞아떨어져야만 했다. 한 박자라도 어긋나면 연출의 미학이 깨졌고, 왕 앞에서의 큰 실례로 여겨졌다. 따라서 사내기생은 무용수이자 정밀한 음악 해석자로서의 역량을 함께 갖추어야 했다.

      무용수인가, 연주자인가 – 이중 역할을 수행한 사내기생

      사내기생 중 일부는 단지 춤을 추는 데 그치지 않고, 궁중악기 연주에도 능통했다. 장악원에서는 무용과 악기, 노래를 병행한 교육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록에는 무대를 꾸미면서 동시에 장구, 해금, 피리 등을 연주하거나, 배경창(背景唱)으로 시가를 읊는 사내기생도 있었다.

      이렇듯 무대 위에서 음악과 움직임을 동시에 주도하는 존재로서의 사내기생은 오늘날로 치면 안무가, 연주자, 배우, 연출자가 합쳐진 하이브리드형 아티스트에 가까웠다.

      정교함의 끝, 감정과 리듬의 조율

      단순히 박자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감정선을 리듬에 실어 동작으로 표현하는 고차원적 연동 능력은 사내기생의 퍼포먼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예컨대, 서정적인 선율에서는 고개를 살짝 떨구고 손끝을 위로 올려 여운을 남기며, 격정적인 장면에서는 큰 동작과 빠른 발놀림으로 전환해 감정을 고조시켰다.

      이 모든 동작은 연주자와의 긴밀한 교감 속에서 이루어졌다. 연주자가 템포를 살짝 늦추면 무용수는 호흡을 조절했고, 반대로 무용수의 동작에 따라 연주자가 박을 맞춰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양방향 조율’은 단순한 기예가 아닌, 궁중 예술의 살아있는 교감 구조였다.

      5. 무대 구성과 군무

      조선의 궁중 공연은 단순한 개인 무용이 아니었다. 특히 왕 앞에서 이루어지는 정재(呈才)는 치밀하게 구성된 무대와 조직된 집단 군무를 통해 왕권의 위엄과 국가의 질서를 시각화하는 장치였다. 이 속에서 사내기생은 하나의 '공연자'를 넘어, 전체 퍼포먼스를 설계하고 완성하는 중심축이었다.

      정재의 무대 구성 – 의례 공간을 예술로 확장하다

      조선의 궁중 연회는 대개 경복궁 경회루, 창덕궁 인정전, 창경궁 통명전 등 의례 공간 내의 특정 장소에서 열렸다. 이 공간들은 엄격한 좌우 대칭 구조와 위계에 따른 배치가 이루어졌으며, 무대도 그러한 정치적 질서를 반영해 기획되었다.

      무대는 단지 물리적 공간이 아닌, 사회적 상징의 시각화였다. 왕은 중앙, 가장 높은 곳에 앉았고, 사내기생의 군무는 이를 중심으로 ‘대칭 구조’를 갖추었다. 이는 유교적 ‘중용(中庸)’ 사상, 즉 균형과 조화를 상징했으며, 공연 자체가 조선 사회의 이념적 구성을 재현하는 기능을 했다.

      군무의 정교함 – 움직임의 질서, 질서의 상징

      사내기생이 추는 춤은 개별적인 감정 표현이라기보다는, 집단으로써 구현하는 상징적 이미지였다. 각자의 위치, 동선, 타이밍은 수없이 연습된 결과물로, 한 사람이 어긋나면 전체의 조화가 무너졌다. 이 때문에 사내기생의 훈련은 개인 기량뿐 아니라, 단체 속의 조율과 협업 능력에 초점이 맞춰졌다.

      대표적인 정재 중 하나인 ‘헌선도’에서는 사내기생 수십 명이 꽃잎 모양의 원형 대형을 이루며 중앙을 향해 나아갔다. 이는 왕에게 바치는 충성과 존경의 형상을 형이상학적으로 구현한 것이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진 군무는 예술을 넘어 국가 권위의 시각적 전시였다.

      의상, 배경, 장치까지 총체적 예술 설계

      무대 구성에는 단지 동선과 동작만이 아니라, **복식과 배경 장치, 음악과 조명(횃불의 위치까지 포함)**이 함께 설계되었다. 사내기생의 의상은 오방색을 바탕으로 신분과 역할에 따라 달랐으며, 이들의 움직임은 색의 흐름을 통해 전체 무대를 살아있는 그림처럼 만들었다.

      심지어 연회장의 바닥에 동그라미, 사각형, 나선형 등의 무대 표시가 남겨져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각 사내기생의 위치를 정확하게 맞추기 위한 장치였으며, 정밀한 공간 통제 하에서 이루어진 퍼포먼스였음을 보여준다.

      6. 복식과 도구의 상징성

      사내기생이 단지 ‘기생의 남성 버전’으로 단순화되는 순간, 그들이 속한 훈련 체계와 예술 조직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다. 조선 시대의 장악원은 오늘날로 치면 국립예술학교이자 궁중 문화 제작 기관이었으며, 사내기생은 이곳에서 정교한 교육과 통제를 거쳐 예술가로 탄생했다.

      예술가 양성 기관으로서의 장악원

      장악원(掌樂院)은 왕실의 공식 음악과 무용, 악기 제작과 연주, 의례 연출을 담당한 국가 직속 전문 기관이었다. 사내기생은 이곳에 선발되어 궁중 정재와 악기, 노래, 시문까지 다양한 분야를 교육받았다. 단순히 춤을 추는 것을 넘어서, 국가 문화 콘텐츠를 기획하고 재현하는 종합 아티스트로 길러졌던 것이다.

      선발은 소년기부터 이뤄졌고, 재능과 외모, 체격은 물론 성격과 성실성까지 고려되었다. 이후 장악원 내에서는 기초 훈련부터 고급 퍼포먼스 훈련, 공연 실습, 악기 병행 교육, 공동 군무 훈련 등으로 체계적으로 성장했다. 교육 기간은 길게는 10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이후 정식 궁중 연회에 배치되었다.

      훈련의 핵심: 감정 조절과 움직임의 일치

      장악원의 훈련은 단순한 기술 숙달이 아닌, 감정 조절과 표현의 예술적 정교화를 중심에 두었다. 예를 들어 춤사위 하나하나에 담긴 상징성과 그에 맞는 감정의 깊이를 이해하고 연기하는 것이 필수였다. 이를 위해 연습생들은 왕실 앞 리허설에 수차례 동원되었으며, 종종 실무 예인으로부터 시조와 가사 창법까지도 함께 배웠다.

      또한 ‘군무’에서의 동선 암기, 타이밍 맞추기, 연출된 시선의 이동 등은 반복적이고 고된 연습을 통해 체득되어야 했다. 이처럼 사내기생은 예술성과 규율성, 상징성과 정서 표현을 모두 갖춘 고난도 예술가로 훈련되었다.

      무대 관리: 퍼포먼스의 완성은 조직력

      장악원은 공연이 끝난 이후에도 사후 무대 정리, 의상 점검, 악기 보관 등 다양한 작업을 감독했으며, 이는 단순한 관리 업무가 아닌 예술 시스템의 일부였다. 사내기생 중 경력이 오래되거나 리더십이 있는 이들은 ‘무대 장’ 역할을 맡아, 후배들의 무대 배치나 공연 연습을 조율하기도 했다.

      이러한 운영 구조는 단순히 예술가들의 집합이 아니라, 조직화된 문화기획 집단으로서의 장악원을 보여준다. 퍼포먼스는 개인의 즉흥적 표현이 아니라, 국가적 위계 속에서 조율된 예술 정치 행위였던 것이다.

      7. 공연의 목적은 감흥과 교육

      조선 궁중에서 사내기생이 펼친 공연은 단순한 오락이나 장식이 아니었다. 그 무대는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고, 백성에게 문화를 통한 교훈을 전달하는 정치적이고 교육적인 장치였다. 즉, 궁중 퍼포먼스는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을 넘어서, 감흥(感興)과 교화(敎化)를 동시에 겨냥한 고도의 의례 예술이었다.

      감흥 – 미학을 통한 왕권의 연출

      궁중 무용은 왕에게 즐거움을 주는 사사로운 오락이 아니라, 왕의 권위를 표현하고, 국가가 품은 ‘질서와 조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청각 퍼포먼스였다. 장엄한 정재(呈才)는 시각적 미감과 음악의 조화, 사내기생의 절제된 동작을 통해 왕과 신하, 나아가 나라 전체가 하나의 중심을 향해 움직이고 있음을 표현했다.

      사내기생의 군무는 이 감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수단이었다. 감정이 절제된 듯하면서도 절묘하게 흐르는 춤과 음악은, 단순한 기예가 아니라 정치 질서와 문화적 이상을 시각적으로 상징하는 구조물이었다. 그로 인해 관객—곧 왕과 신하, 외국 사절단—은 감탄과 경외심을 느끼도록 유도되었다.

      교육 – 유교적 이상을 몸짓으로 전하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다. 백성의 도리를 가르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형식의 ‘교육’이 정치의 핵심이었으며, 공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궁중 연회에서 공연된 춤과 음악은 대부분 충(忠), 효(孝), 예(禮), 절제(節制), 정(情)의 미덕을 주제로 했다.

      사내기생이 추는 춤은 이러한 주제를 몸으로 전하는 교과서와 같았다. 예를 들어, 왕에게 올리는 ‘헌선도’에서는 꽃을 바치는 동작이 ‘충성심’을, 완만한 선율에 맞춘 군무는 ‘질서’를, 회오리형 대형은 ‘우주적 조화’를 뜻했다. 즉, 공연은 ‘미학적 감상’을 넘어, 몸짓으로 구현한 국가 철학이었다.

      예술을 통한 이상적 국가 이미지 구축

      이처럼 감흥과 교육을 통합한 궁중 공연은, 사내기생을 중심으로 완성된 이상 국가 이미지의 무대적 재현이었다. 이는 단지 무용수나 연기자의 수준을 넘어서, 조선이라는 국가 자체의 이상을 퍼포먼스로 구현하는 기획자이자 상징으로서의 사내기생 존재를 보여준다.

      오늘날 공연 예술이 대중과 감정을 공유하는 수단이라면, 조선의 궁중 공연은 권력과 이상을 전달하는 **감정의 정치(感情政治)**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철저하게 훈련된 사내기생이 존재했다.

      형식을 지닌 퍼포먼스, 사내기생은 조선 문화의 연출자였다

      조선의 사내기생은 단순히 명령에 따라 춤추고 노래하던 ‘하급 연행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엄격한 형식 속에서 움직이며, 예술을 통해 조선의 문화와 권력을 시각화한 무대 연출자이자 퍼포먼스 디자이너였다. 이들의 무대는 미적 감상에 그치지 않고, 정교한 기획과 규범을 바탕으로 한 상징적 재현의 장이었고, 거기에는 단 하나의 동작도 즉흥성이 허용되지 않았다.

      공연은 감각이 아닌 규율로 구성되었다

      사내기생의 춤은 아름다움을 위한 몸짓이 아닌, 국가 의례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정재는 정해진 음악, 고정된 복식, 수백 번 반복된 훈련을 통해 완성되었고, 이는 곧 조선 사회의 규범과 이상을 예술적으로 재현하는 형식 그 자체였다. 공연은 곧 상징이고, 상징은 정치였으며, 사내기생은 그 정치를 표현하는 실천자였다.

      그들은 수많은 리허설을 거치며 공연 순서를 익혔고, 왕의 움직임과 행사 전개에 따라 정확한 타이밍에 등장하거나 퇴장해야 했다. 이 같은 통제된 연출은 사내기생을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국가 상징 연출의 핵심 인물로 만든다.

      무대 위 연출자는 누구였는가?

      사내기생은 때로 연회의 주제에 따라 공연 동선을 기획하거나, 후배 기생의 동작을 조율하기도 했다. 장악원 내부에서 연차가 높은 사내기생은 일종의 무대 감독 역할을 맡아 전체 공연의 분위기를 설계하거나, 왕의 취향과 과거의 연회 기록을 바탕으로 적절한 콘텐츠를 선택하기도 했다. 이는 그들이 단지 예술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연출자이자 기획자로도 활약했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기록 중 일부에서는 “예인 ○○가 공연 대형을 고안하였다”는 식의 언급이 남아 있다. 사내기생은 자신이 직접 무대에서 움직이는 동시에, 공연의 틀을 짜고 구성하는 실질적 조정자로 기능했다.

      연출의 미학과 정치의 언어를 아는 존재

      사내기생이 다룬 정재와 궁중 공연은 단순한 춤이나 노래가 아니었다. 그것은 군주의 위엄, 백성의 충성, 유교적 질서, 자연의 조화를 동시에 상징하는 복합적 메시지를 담은 퍼포먼스였다. 그리고 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최전선에서 움직였던 이들이 바로 사내기생이었다.

      그들은 문화의 언어, 정치의 의미, 예술의 규율을 함께 이해하고 체현한 다층적 존재였다. 한 마디로 말해, 사내기생은 조선 궁중 문화의 예술적 연출자였으며, 왕의 뜻을 감각으로 번역하는 전문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