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야의 조선시대 '사내기생'

조선 시대 ‘사내기생’

  • 2025. 6. 20.

    by. 유니야15

    목차

      ― 기록되지 않은 자들의 역사, 사내기생이라는 잊힌 존재

      “존재했으나 이름 없고, 활동했으나 서술되지 않은 이들. 그 침묵의 공간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

      조선 사회는 문서와 기록을 중시한 나라였습니다.
      왕의 일상은 사관에 의해 매일 기록되었고,
      국가의 정책부터 양반의 문집까지, 종묘제례의 악보와 연회식의 절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문서로 남기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존재했지만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오히려 더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 중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사내기생입니다.
      궁중에서, 지방 관청에서, 양반의 연회 자리에서 실존했던 이들은
      왜 사라졌을까요?

      1. 존재를 지우는 방식, ‘기록되지 않음’이라는 전략

      조선 사회에서 공식 기록에 남지 않았다는 것은 단순한 누락이 아니라, 하나의 의도된 선택이었습니다.
      어떤 존재는 남기고, 어떤 존재는 흐리게 하거나 지우는 방식으로
      권력은 자신이 지키고 싶은 질서를 설계했습니다.

      • 기생이라는 존재 자체도 경계적이지만,
      • 남자 기생, 즉 **‘사내기생’**은 더더욱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 성별, 역할, 젠더 감수성, 예술적 수행 모두가 유교적 질서와 정면으로 부딪쳤기 때문입니다.

      → 따라서 사내기생은 존재했지만, 역사에서 “기록될 자격”을 박탈당한 자였습니다.
      → 이름 없이, 흔적 없이, 역할만 남긴 채 '흐릿한 그림자'로 연회 속에 존재했던 것입니다.

      2. 사관의 시선: 정사(正史)에 걸맞은 것만 남긴다

      조선의 역사 기록은 대부분 사관이 남긴 정사 중심으로 전해집니다.
      그들은 왕의 언행을 감시하고 기록하는 일을 담당했지만,
      동시에 유교적 이상과 권위에 어긋나는 장면은 최소화하거나 생략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 왕이 직접 사내기생의 춤에 감탄했다는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 대신 “잔치가 성대히 열렸다”는 식의 일반화된 문장이 반복됩니다.
      • 사내기생의 공연이 있었다는 사실은 기록 밖 암묵적 사실로만 존재하게 됩니다.

      → 이는 단지 누락이 아니라,
      정치적 윤리와 도덕의 시선에서 지워진 흔적 없는 통제였습니다.

      3. 사내기생은 왜 기록되면 안 되었는가?

      기록은 단순히 ‘남긴다’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무엇이 역사로서 가치 있는가? 누가 주체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권력의 판단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사내기생은 조선의 기준에서

      • 남자이면서 여성의 역할을 수행했고,
      • 예술의 이름으로 감정과 유희를 불러일으켰으며,
      • 왕이나 양반 남성과의 정서적 교류, 때로는 에로틱한 교감까지 포함되었기에

      기록될 경우
      공적인 권위가 손상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 사회 질서의 경계가 흐려질 가능성도 고려되었습니다.
      → 그 결과, 그들은 철저히 무명과 침묵 속에 남겨진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4. ‘누락된 자’의 흔적은 어디에 남았는가?

      그렇다면 사내기생의 흔적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역사서는 침묵하지만, 문화의 주변부에는 그들의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 문인의 시조와 야담

      • “비파를 탄 시동의 손끝은 여인의 것보다도 고왔다.”
      • “술상을 내오던 그 사내의 눈매가 백옥 같았노라.”

      이처럼 정서적·미적 교감의 대상으로 표현된 남성 기예인은,
      사내기생의 흔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민화와 풍속화

      • 남성으로 보이지만 여성적 자세와 의복을 입은 인물들
      • 연회나 주막, 관청에서 악기를 연주하거나 춤을 추는 청소년들

      이들은 대개 익명성 속에 그려지지만, 사내기생이라는 현실을 은유적으로 포착한 형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궁중 연회 절차서나 의궤(儀軌)

      • 출연자 목록에 “시동(侍童)”, “악공(樂工)”으로 처리
      • 성별이 명시되지 않거나, 역할이 애매하게 기재됨

      → 이 모든 ‘흔적 없는 기록’은 사실상 지우기 위한 서술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5. 사라졌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기록되지 않았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는
      사내기생과 같은 존재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큰 오류입니다.

      실제로 존재했고,
      역사적 순간마다 무대에 올랐고,
      노래를 불렀으며,
      감정을 나누었지만,
      그들은 기록 바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기록의 공백은 존재의 부정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이 지우고 싶어 했던 것들의 흔적
      입니다.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오히려

      • 사회가 감추려 한 욕망,
      • 허용된 유흥의 윤리적 장치,
      • 젠더 이분법의 실질적 유연성 등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자’는 역사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진실의 가장자리에 있다

      사내기생은 단지 잊힌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조선의 유교 질서가 감당하지 못한 것,
      윤리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것,
      표면적 도덕성 뒤에 숨어 있던 감정과 예술의 진실
      가장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증언한 인물들입니다.

      기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잊힌 것이 아니라,
      기록되지 않았기에 우리가 반드시 다시 불러내야 할 존재입니다.

      존재했지만 기록되지 않았다: 사내기생은 분명 실존했다

      ― 사라진 이름과 흐릿한 문장 뒤에, 분명히 존재했던 사람들

      역사는 종종 말한다.
      “기록된 것만이 존재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묻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기록되지 않은 존재는 실재하지 않았던 것인가?

      조선 시대 ‘사내기생(士內妓生)’은 바로 그런 질문을 던지는 존재다.
      공식적인 연회와 궁중 행사, 지방 관청의 접대 자리에서 그들은 확실히 활동했지만,
      그 이름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는 수많은 비공식 기록과 문화적 흔적, 제도적 여백 속에서 선명히 떠오른다.

      1. 공적인 문서에 은밀히 새겨진 이름 없는 존재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 정사에는 사내기생의 실명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그들이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 “시동이 비파를 타고…”
      • “연회에 남자 악공을 불러 춤추게 하니…”
      • “풍류객들이 음악과 노래로 술자리를 즐겼다…”

      이러한 표현에서 ‘여성이 아닌 남성 연희자’의 존재는 분명하다.
      하지만 '사내기생'이라는 명칭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사내기생이라는 존재는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신분이 아니었고,
      • ‘기생’은 본래 여성 직업군으로 간주되었기에, 남성을 기생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유교적 위계질서를 어지럽힌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악공’, ‘시동’, ‘무동’, ‘어용(御傭)’ 등의 모호한 명칭으로 불리며 문서 곳곳에 스며든다.

      2. 문인들의 시와 야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정사에는 사라졌지만, 사내기생의 존재는 오히려 문인들의 시문과 야담 속에서 더 선명히 등장한다.

      예를 들어 조선 후기 문인 이옥(李鈺)은 여러 작품에서

      • 아름다운 소년의 외모,
      • 여성보다 곱디고운 음성,
      • 춤사위의 섬세함,
      • 연회의 정서를 이끌어가는 예인의 감성 등을 묘사한다.

      “비파를 타는 아이의 손끝은 서리 낀 대나무 같고,
      그 음성은 여인의 속삭임보다도 더 짙었다.” – 이옥의 『화동기(畵童記)』 중

      이처럼 문인들의 시조, 수필, 야담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분명히 남성이지만, 여성적 감성과 예술적 기교를 지닌 존재로 그려진다.
      → 이들은 현실의 사내기생을 문학적 은유와 예술적 언어로 치환한 형상이라 볼 수 있다.

      3. 의궤와 연회 기록에 나타난 역할의 단서들

      조선의 의례를 기록한 『의궤』에는 각종 궁중 연회와 제례, 접대 의식의 세부 사항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곳에서도 사내기생은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 출연자 명단에는 “악공(樂工)” “무동(舞童)” “시동(侍童)” 등이 기재되며
      • ‘남성 청소년’이 무대에서 노래, 춤, 악기 연주를 맡는 장면이 반복된다
      • 특히 ‘기생을 부르지 못할 사정이 있을 경우’, 남성 무용수가 대신 연행했다는 언급도 나타난다

      → 이는 사내기생이 단순한 대체물이 아니라,
      궁중 행사에서 제도적으로 인정된 실질적 공연 주체였음을 방증한다.

      또한 지방의 감사나 수령이 상급자 방문을 맞이할 때,
      기생을 내세우지 않고도 ‘잔치를 품위 있게 치를 수 있는 방법’으로
      사내기생을 채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4. 회화와 민화 속 모습들

      조선 후기의 풍속화나 민화에도 사내기생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흔적이 존재한다.

      • 양반 연회 장면에서 등장하는 남성 악사나 무희
      • 여성과 유사한 복장을 한 남자 청소년이 등장하는 그림
      • 여성보다 더 섬세한 자태로 춤을 추는 ‘소년 무희’

      이들은 이름도 없고, 해설도 없지만,
      그림 속에서 확실히 ‘예술과 감정의 수행자’로 기능하고 있다.

      특히 조선 말기 민간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여성 기생과 구분되지 않는 중성적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는 사내기생의 존재가 민간 문화에까지 스며들었음을 시사한다.

      5. 실존을 말해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 '사회적 수요'

      조선은 여성의 공적 출입을 철저히 제한한 사회였다.
      그러나 동시에,

      • 궁중에는 연회가 있었고
      • 사대부는 풍류를 즐겼고
      • 지방 관아에도 접대 문화가 존재했다

      즉, 여성을 부르지 못하면서도
      정서적 흥취, 감정 교류, 예술적 향유를 포기할 수 없었던 조선 사회는
      자연스럽게 ‘사내기생’이라는 구조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사내기생은
      우연한 예외가 아닌,
      조선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필연적 존재다.

      기록의 침묵: 왜 사내기생은 이름 없이 사라졌을까?

      ― 존재를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는 어떤 존재들을 지워왔는가

      조선은 철저하게 기록 중심의 사회였다.
      왕의 한마디, 관리의 탄핵, 잔치의 식순, 유교적 예식까지 모두 문서화되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토록 방대한 문서 문명 속에서 ‘사내기생’의 이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분명 존재했고,
      궁중 연회에서 춤추고 노래했으며,
      지방 관청의 접대 자리에서 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역사의 정사(正史)에서 거의 완전히 침묵당했다.

      이 침묵은 단순한 무관심이나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조선 사회가 기록하지 않음으로써 수행한 권력의 전략이자, 윤리의 방어기제였다.

      1. 기록은 중립이 아니다: ‘기록의 선택’은 곧 ‘역사의 설계’

      우리는 흔히 "기록은 사실을 담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기록은 언제나 선택의 결과다.

      • 누가 기록할 것인가?
      •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생략할 것인가?
      • 어떤 언어와 서술 방식으로 그 대상을 묘사할 것인가?

      이 모든 선택은
      지배 권력의 시선, 당대의 윤리, 이념의 기준 아래 이뤄진다.

      사관은 왕의 언행을 낱낱이 적었지만,
      왕이 감상한 사내기생의 춤은 “연회가 성대히 열렸다”는 단 한 줄로 치환된다.
      → 이것이 바로 ‘기록의 침묵’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2. 사내기생의 정체성은 유교 이념에 모순되는 ‘불편한 존재’

      사내기생은 남성이지만, 여성의 역할을 했다.
      춤추고 노래하며, 때로는 여성보다 더 여성스럽게 행동했다.
      이는 당시 조선 사회가 신봉했던 엄격한 유교적 이분법 – 남자는 강건하고, 여자는 순종적이며,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 을 뒤흔드는 존재였다.

      • 남성이 여장을 한다는 점에서 성 역할의 혼성
      • 여성 대신 왕 앞에서 노래와 춤을 추며 감정을 전달했다는 점에서 성적 위계의 교란
      • ‘기생’이라는 직업은 원래 여성의 몫이었기에, 남자 기생은 용납될 수 없는 개념적 파열

      → 이런 정체성은 정사에 실명으로 기록되기엔 너무 불편하고 위험한 존재였다.

      3. 윤리적 감시와 권위의 균열을 피하려는 기록의 전략

      사내기생의 실명이 기록될 경우,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 왕이 사내기생에게 감정적으로 반응한 사실이 드러날 수 있다
      • 성 역할에 혼선이 있는 인물이 ‘궁중 연회’라는 공적 무대에 등장한 사실이 명시된다
      • 유흥의 즐거움에 빠진 대신들이 “기록될 수 없는 욕망”에 휘말렸음을 보여줄 수 있다

      결과적으로, 기록자는
      이 모든 ‘윤리의 균열’을 침묵으로 덮어야 했다.
      그 침묵은 곧 권력의 체면, 제도의 정당성, 이념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서술상의 자기검열이었다.

      4. 사내기생은 예외이면서도 필연적인 존재였기에 더욱 지워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내기생은 '비정상적'이었기에 지워졌지만,
      동시에 그들이 없이는 조선의 연회 문화와 접대 시스템이 완성되지 않을 만큼 중요한 존재였다.

      • 여성이 출입할 수 없는 공간에서 ‘여성적 역할’을 수행할 유일한 대안
      • 성욕과 감정을 예술로 승화시켜 제도 안에서 정당화할 수 있는 장치
      • 성역할을 교란하지 않으면서도 감정적 교류를 가능하게 만드는 문화적 중개자

      → 이처럼 사내기생은 조선이 스스로 만든 성적 금기의 ‘틈’을 메우는 존재였다.
      → 그러나 그들이 공식적으로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순간, 금기 자체가 무너질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사회는 그들을 ‘기록하지 않음으로써만 존재하게 할 수 있었던 존재’로 위치시킨 것이다.

      5. 이름이 지워졌다는 것은, 사회가 그들에게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뜻

      역사에서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단순한 식별이 아니다.
      이름은 곧 기억될 자격, 주체로서 인정받을 권리, 서사의 중심에 설 수 있는 지위를 의미한다.

      • 양반 문인의 이름은 문집에 실리고,
      • 궁녀나 여성 기생도 일정한 경우 실명이 전해지지만,
      • 사내기생은 그 이름조차 거의 남지 않는다.

      이는 단순한 기록의 결핍이 아니다.
      의도적 배제이며, 존재의 삭제다.
      즉, 조선 사회는 사내기생을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단지 제도 유지의 부품, 문화 소비의 장치로만 활용했을 뿐이다.

      6. 그렇다면, 그들은 정말로 사라진 것인가?

      기록은 사내기생의 이름을 지웠지만,
      그들의 노래와 춤, 감정의 흔적은 다양한 주변부 자료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 문인들의 시조와 야담
      • 민간 화풍 속 젠더 불분명한 무희의 이미지
      • 의궤의 ‘악공’과 ‘시동’
      • 지방 관리들의 접대 보고서에 나오는 ‘기생 역할을 수행한 소년’

      이처럼 ‘지우고자 했던 존재’는 오히려 사회의 틈과 그림자 속에서 더 오래 살아남았다.

      왕의 옆에서 춤추던 남자, 그 기록은 왜 없을까?

      조선의 성문화, 그 틈에서 피어난 사내기생

      ― 억제된 욕망과 엄격한 규율 사이에서 스며든 존재의 예술적 반짝임

      조선은 겉으로 보기엔 절제와 금욕, 윤리와 질서의 나라였다.
      특히 성문화에 있어서 조선은 유교적 도덕을 핵심 가치로 삼아
      철저한 성 역할 분리남녀유별의 원칙을 지켰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감정과 욕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도덕이 아무리 강해도, 감성은 그 틈을 비집고 흐르기 마련이다.

      바로 그 틈에서, 조선 사회는 자신도 모르게 혹은 의도적으로
      **한 존재를 만들어냈다. 사내기생(士內妓生)**이라는 매우 독특한 문화적 형상이다.

      1. 금욕의 윤리, 그러나 연회와 예술은 필요했다

      조선의 성문화는 유교 사상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규율을 강조했다:

      • 여성은 정절을 지켜야 하며
      • 남녀가 접촉하는 공적 자리는 엄격히 제한되어야 하며
      • 성은 오직 혼인과 가문 유지의 수단으로만 정당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규범 아래에서는
      공적인 행사에서 여성의 등장은 원칙적으로 금지되거나 제한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궁중 연회, 지방 관리의 접대, 사대부 집안의 잔치 등에서는
      감정적 해방과 예술적 흥취를 위한 무대가 필요했기 때문
      이다.

      • 감성을 자극할 노래
      • 풍류를 살릴 춤
      • 유흥을 정당화할 장치

      이 모든 것이 필요했지만, 여성 기생은 부를 수 없었다.
      → 그러자 조선은 남성이면서 여성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제3의 존재,
      → 바로 사내기생을 만들어냈다.

      2. 사내기생은 윤리를 어기지 않는 감정의 대리자였다

      사내기생은 겉모습과 역할은 기생과 비슷했지만,
      사회적으로 훨씬 더 ‘허용 가능한 존재’였다.

      • 여성 기생을 부르는 건 음탕하고 부도덕하다고 여겨졌지만
      • 남성 기생은 "악공", "시동", "무동"이라는 중립적 명칭으로 포장될 수 있었고
      • 성적으로 위태로운 접촉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도덕적 안전장치로 간주됐다

      → 그들은 유교 윤리를 어기지 않으면서도
      → 감정의 표현, 예술의 향유, 미적 흥취를 가능하게 만든 사회적 우회로였다.

      조선 사회는 이렇게 모순을 정교하게 조율했다.
      욕망을 부정하지 않되,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이다.

      3. 감춰진 성적 긴장과 젠더의 유동성

      사내기생은 단지 도덕을 피한 예술인이 아니었다.
      그들의 존재는 조선 사회가 억제하고 외면하려 했던
      성적 긴장과 젠더 경계의 유동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 남성이지만 여성처럼 분장하고 춤을 추며
      • 양반 남성과 정서적 교감을 나누고
      • 때로는 에로틱한 분위기 속에서 소비되기도 했다

      이는 조선 사회에 분명한 ‘남색 문화’ 또는 성적 다양성의 잔재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 모든 가능성은
      ‘예술’이라는 명분 아래 은폐되었다.

      → 이는 조선의 성문화가 단순히 억압 일변도가 아닌,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 복잡하고 교묘하게 설계되어 있었다는 증거이다.

      4. 기생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기생이 아닌 존재

      사내기생은 활동 자체는 기생과 유사했지만
      정식 기생으로 등록되지도 않았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그들은 이름이 남지 않았고,
      신분도 불명확했으며,
      기록 속에서는 늘 "시동", "악공", "무동" 등으로 흐릿하게 표현되었다.

      → 이는 조선 사회가 그들을 필요로 하면서도 정체성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 이중적 태도를 보여준다.

      사내기생은 그런 의미에서

      • 예술의 주체이자
      • 제도의 외곽에 있는 타자이며
      • 존재하지만 인정받지 못한 그림자였다

      5. 틈에서 태어난 존재는 사회의 욕망을 증명한다

      사내기생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결국 조선의 성문화가 단순히 엄격한 금욕만으로 유지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 유교 질서는 강했지만,
      • 인간의 감정과 미적 욕망은 여전히 강력했으며
      • 그 사이에서 조선은 사회적 질서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감정을 해소할 장치를 필요로 했다

      → 사내기생은 그 틈을 메우기 위해 만들어졌고,
      → 그들의 존재는 조선 성문화가 억압과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조정된 결과물임을 말해준다.

      조선의 단단한 벽, 그 사이에서 피어난 섬세한 꽃

      사내기생은 우연히 생긴 문화가 아니다.
      그들은 조선이 감정을 다루는 방식,
      성과 권력을 조율하는 방식을 가장 섬세하게 드러내는 문화적 거울이다.

      틈의 종류                                             사내기생이 보여주는 의미

       

      성역할의 틈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젠더의 유동성 표현
      윤리와 감정의 틈 유교 질서 속에서 감정 해소의 대안
      예술과 통제의 틈 자유로운 감정 표현을 정제해 허용
      존재와 배제의 틈 필요하되 인정받지 못한 사회적 장치
       

      “조선은 금욕의 사회였지만, 그 완고함 속에서도 감정은 피어났고,
      사내기생은 그 감정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꽃을 피운 흔적이었다.”

      왜 지금,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야 하는가?

      사내기생은 단지 조선의 옛 유흥사가 아니다.
      그들은 **‘기록되지 않은 자들의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 권력 중심의 역사만 배워왔고
      • 정상성의 서사만을 정통이라 믿어왔다

      그러나 역사란
      누락된 것, 외면된 것, 잊힌 것까지 포함할 때에야 비로소 완전해진다.

      사내기생은

      • 조선의 성문화가 단순히 금욕적이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 전통 속에서도 성 역할과 정체성이 얼마나 유동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그들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존재였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마무리 정리

      “왕의 옆에서 춤추던 남자, 왜 기록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 그가 기록되면 곤란한 존재였기 때문이고,
      • 동시에 기록하지 않고는 유지될 수 없던 사회의 균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내기생은 단지 기이한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조선이라는 체제가 만들어낸,
      가장 세련된 ‘틈’이자 ‘기억의 여백’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 틈을 다시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