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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성별 이분법의 바깥에서 춤추던 경계인의 이야기
“남자도 여자도 아닌, 그러나 확실히 누군가였던 사람들”
조선 사회는 분명히 이분법적인 젠더 질서를 바탕으로 작동했다.
남자는 관직과 가부장적 권한을,
여자는 가사와 자녀 양육, 그리고 제한된 문화활동의 공간을 할당받았다.
이런 틀 속에서 젠더는 태어남과 동시에 ‘정해진 길’이 되었고,
그 길에서 벗어난 자는 사회적 인정은커녕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기 쉬웠다.하지만, 모든 시대에는 규범이 균열을 일으키는 틈새가 있고,
그 틈에서만 허용되는 예외적인 존재들이 있다.
조선의 사내기생은 그 예외이자, 경계였고,
동시에 질서 밖에서 질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이율배반적인 인물이었다.중간의 공간, 제도화되지 않은 존재
사내기생은 기생으로 등록되지도 않았고,
악공이라는 일반 남성 연희자와도 구분되는 역할을 맡았다.
그들은 정식 명칭도 직함도 없었지만,
실제로는 연회의 중심에서 가장 강한 시선과 감정을 끌어내는 인물이었다.- 왕의 연회 자리에서 여성 기생이 출입할 수 없을 때
- 군영이나 지방에서 여성 연희자가 부족할 때
- 사대부 남성의 정서적 욕구나 미적 감흥을 자극할 대상이 필요할 때
이 모든 상황에서 “남성이지만 여성의 정서를 수행하는 이”,
즉 사내기생이라는 존재가 등장했다.
그들은 한 명의 ‘남성’으로 살지도, 완전한 ‘여성’으로 받아들여지지도 못했다.
그들은 오직 ‘무대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던 젠더의 경계인’이었다.존재를 지우는 방식: 감추되 활용하라
흥미로운 건, 사내기생은 분명 필요했지만,
공적으로 말할 수 없는 존재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여장을 했지만 “기생”이라 불릴 수 없었다.
- 여성 역할을 했지만 성적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고,
- 예술을 수행했지만 공식 제도에는 편입되지 않았다.
이는 곧, 조선 사회가
**“감추되, 활용하고자 했던 젠더 다양성”**을
사내기생이라는 문화적 도구를 통해 은근히 실현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정체성을 말할 수는 없지만, 감정은 전달하게 하라.
→ 제도는 부정하되, 감각은 허용하라.
→ 현실에서는 남성이되, 무대에서는 여성성을 연기하라.이러한 모순적인 요구는
사내기생이 끊임없이 경계 위에 서게 만든 핵심 이유였다.춤과 노래, 그리고 정체성의 연기
사내기생은 단순히 노래하고 춤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조선의 문화적 억압과 예술적 욕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스스로를 젠더 퍼포머로 탈바꿈시키며,
자신의 정체성을 ‘연기’라는 형식으로 안전하게 위장했다.- 여성 기생이 하는 애교 있는 화법과 몸짓을 모방하면서도
- 남성의 몸에서 나오는 강한 에너지를 춤으로 풀어냈으며
- 관객과의 교감을 통해 정서적 위안을 제공했다
그들은 ‘남자처럼 생긴 여자’를 연기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필요로 한 이상적인 감정 수행자’**를 만들어냈다.
그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할과 무대, 대상에 따라 유동적으로 바뀌는 다층적 존재였다.그들이 ‘경계인’이었다는 것의 의미
‘경계인(In-Between)’이라는 말은 어쩌면 사내기생을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단순히 성별만이 아니라, 사회적 위치, 감정의 표현, 예술의 실현 방식에서
늘 한쪽에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경계에 머물러야 했던 존재였다.-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자주 호출되었다
- 역할 수행은 강요되었지만, 정체성은 말해지지 않았다
- 기록에는 없지만, 그림과 복식, 도구 속에 분명히 존재했다
→ 이들은 조선이라는 질서 바깥에서,
→ 그러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했던 유동적 존재들이었다.우리는 왜 이 경계인의 춤을 다시 들여다봐야 할까?
오늘날 젠더에 대한 이해는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예전에는 그랬던 적 없다”거나
“다양성은 근대 이후의 이야기”라고 믿는다.그러나 사내기생의 이야기는 그 믿음을 부순다.
그들은 조선이라는 강력한 성별 이분법 사회 속에서도
분명히 존재했고, 움직였고, 노래했다.
그리고 그 존재는 단지 예술로서가 아니라,
사회가 무의식적으로 인정했던 젠더의 다양성으로 해석될 수 있다.“그들은 단지 춤을 춘 것이 아니라,
성별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수많은 가능성을
온몸으로 무대 위에 올려놓았던 ‘침묵의 개척자’들이었다.”1. 사내기생이란 누구였나?
― 여도 남도 아닌, 그저 ‘기생의 역할’을 수행한 자들
사내기생(士內妓生)이라는 단어는 오늘날 우리에게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기생’ 하면 대부분 화려한 복장을 한 여성 연희자를 떠올리지만,
‘사내기생’은 남성이면서 기생의 역할을 수행한 존재,
즉 성별 경계를 넘나들며 예술과 감정의 매개자로 살아갔던 경계적 인물이었다.하지만 단순히 ‘남자 기생’이라고 단정하기에는
그들의 존재는 훨씬 더 복잡하고,
당시 조선 사회의 젠더 규범, 예술 체계, 사회적 욕망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었다.① 어원과 용례: ‘사내기생’은 공식 호칭이 아니었다
우선 ‘사내기생’이라는 용어는 조선 시대 공식 문서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사회적으로 필요했지만, 제도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존재였음을 보여준다.- 사내기생이라는 말은 후대에 민간 차원에서 회고적으로 붙인 명칭에 가깝다.
- 실제 조선 후기 문헌이나 지방지에는 “시동(侍童)”, “무동(舞童)”, “남색(男色)의 기생” 등의 간접 표현이 보인다.
- 어떤 경우에는 ‘기생’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남성이라는 정체성은 암묵적으로만 언급되었다.
즉, 사내기생은 말할 수 없지만 존재하는 인물,
정체성은 은폐되었지만 역할은 인정받은 존재였다.② 여성 기생과 동일한 역할, 그러나 다른 의미
사내기생은 여성 기생과 매우 유사한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활동을 수행했다:- 궁중 연회에서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 퍼포머
- 양반 사대부의 연회 자리에서 술시중 및 대화 상대
- 악기 연주와 시낭송, 풍류의 조율자 역할
- 예술적 감정 표현을 통해 분위기를 완성하는 존재
하지만 중요한 차이는 ‘그들이 남성이었다는 점’이며,
이 성별 차이는 당시 사회에서 사내기생의 정체성을 공적으로 말하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여성 기생이 제도화된 신분이었다면,
→ 사내기생은 일시적 대체자, 또는 연출된 여성성의 상징으로만 활용되었다.③ 왜 남자가 기생 역할을 했는가?
이는 단순한 ‘기생 부족’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내기생이 필요했던 이유는 조선 사회의 특수한 젠더 규범과 사회문화적 구조에 있었다.- 궁중이나 군영 등 여성의 출입이 엄격히 제한된 장소에서 예술적 연희가 필요했을 때
- 여성 기생이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곤란한 상황에서 정서적 대체자가 필요했을 때
- 남색 문화나 남성 간 유대가 존재하던 문화적 배경에서 '성적/감정적 상호작용'을 모호하게 수행할 인물이 필요했을 때
이처럼 사내기생은 단지 ‘남자도 춤췄다’는 차원의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사회가 감추고자 했던 정서, 성적 긴장, 예술적 욕망을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연기한 자’였다.④ 분장, 복식, 정체성의 경계
사내기생은 복장에서도 경계를 넘나들었다.
- 화장과 분장을 하되, 여성 기생처럼 화려하진 않았다.
- 복식은 여성적 디자인과 남성적 재단이 혼합된 중성적 스타일이었다.
- 머리 모양이나 소품, 악기 등은 여성 기생의 것과 비슷했지만 약간의 ‘비틀기’가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미학이 아니라 사회적 전략이었다.
→ "여장을 하되, 여자가 아님을 알 수 있도록"
→ "여성처럼 보이되, 실제 여성 기생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 즉, 사회적으로 허용 가능한 ‘여성성의 흉내’만을 허용한 것이다.⑤ 그들은 누구의 욕망을 연기했는가?
사내기생은 자발적으로 등장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왕과 양반, 지배계층 남성들의 정서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호출된 존재였다.- 사회적으로는 유교적 윤리가 작동하지만,
- 실생활에서는 ‘감정을 풀고 싶은’ 지배층의 욕망이 존재했고,
- 그것을 표현할 수단으로서 ‘사내기생’이라는 탈성별적 존재가 필요했다.
이런 맥락에서 사내기생은 조선 시대의 사회적 억압과 금기를 우회하는 매개자였으며,
그 존재 자체가 조선 사회의 이중성과 문화적 긴장을 드러내는 거울이었다.사내기생은 누구였나?
항목 내용존재 유형 남성이면서 여성 기생의 역할을 수행한 연희자 정체성 성별·신분적으로 공식화되지 않은 경계적 존재 역할 연회, 공연, 감정 표현, 정서적 매개, 때로는 성적 암시 수행 복식 특징 중성적, 기능 중심, 여성성과 남성성의 결합 사회적 위치 제도권 밖의 필요성 기반 존재 문화적 의의 젠더 질서의 균열, 사회적 이중성의 상징 “그들은 남자였고, 기생이었으며,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하지만 그 무대 위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진짜였다.”2. 왜 조선은 ‘남자 기생’을 필요로 했을까?
― 유교 사회의 금기와 욕망이 공존한 문화적 역설
조선을 우리는 흔히 ‘성리학 사회’, ‘유교적 질서의 나라’라고 부른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철저히 구분되고,
여성은 집 안에 머물며, 남성은 공적 영역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규범이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 있었다.그런데, 이처럼 성별 역할이 명확했던 시대에
왜 여성의 영역으로 인식되던 ‘기생’의 역할을 남성이 대신하는 일이 생겨났을까?그 배경에는 단순한 인력의 문제만이 아닌,
조선 사회가 억눌러왔던 감정, 미학, 성적 욕망, 제도적 모순의 총합이 있었다.
사내기생은 바로 그 틈에서, 사회가 말할 수 없었던 욕망을 예술로 포장한 채 현실화시킨 존재였다.① 유교 질서 속 여성 억압의 결과: ‘여성 기생의 부재’가 만든 대체자
조선 후기까지도 기생은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기생은 그 출입과 활동 범위가 제한적이었다.- 궁궐 내에서 여성 기생은 함부로 드나들 수 없었다.
- 관아, 군영, 지방 축제 등 남성 중심 공간에는 여성 기생의 출입이 제도적으로 금지되거나 엄격히 통제되었다.
-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는 기생 자체가 충분하지 않았으며, 기생 양성 체계가 미비하거나 단절된 지역도 존재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사내기생이었다.
여성 기생을 사용할 수 없는 자리에서,
남성이 여성 기생의 역할을 흉내 내며 감정적, 미학적, 오락적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이는 단순한 대체가 아니라, 사회적 제약이 만들어낸 문화적 기능 조정의 결과였다.
② 감정을 표현하고 향유하고자 했던 권력자의 욕망
조선의 지배층 ― 왕, 양반, 군영 장교 등 ― 은 겉으로는 유교적 윤리를 중시했지만,
실제로는 예술과 감정의 향유, 그리고 정서적 위안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궁중 연회에서는 노래, 춤, 시조 낭송 등이 빠지지 않았다.
- 사대부의 잔치와 송별연, 승진 축하 자리에서는 기생이 반드시 등장해야 분위기가 성립되었다.
- 감정 표현이 억제된 사회에서는, 오히려 예술을 통한 감정의 간접적 해소가 더욱 절실했다.
하지만 여성 기생을 부를 수 없는 자리, 또는 불러선 안 되는 상황에서는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역할을 맡은 이가 바로 사내기생이었다.→ 그들은 여성적 감성을 표현할 수 있었고,
→ 감정 이입을 유도하며 분위기를 조율하는 기능을 맡았다.사내기생은 단지 “남자가 춤을 춘 것”이 아니라,
감정의 통로이자, 권력자의 미적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문화적 장치였다.③ 남색(男色)과 정서적 교류의 배경
조선에는 겉으로는 금기시되었지만, 은밀하게 유지된 남색(남성 간 정서적·성적 교류)의 문화적 잔재도 존재했다.
- 고려 시대부터 이어져 온 남색 문화는 조선 초기까지 유지되었으며,
- 문헌 속에는 “예쁜 소년을 곁에 두고 풍류를 즐겼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 이를 정면으로 인정하지 않되, 풍류라는 명목 아래 미묘하게 허용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다.
사내기생은 그런 남성들 사이에서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정서적 교류의 매개자로 기능했다.- 아름다운 외모, 여성스러운 몸짓, 감정이 담긴 노래
- 하지만 실질적 성적 접촉 없이, ‘정서적 애무’ 수준에서 멈추는 안전한 욕망의 대상
→ 조선 사회는 ‘여성’을 대상으로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건 공공의 질서를 해친다고 보았고,
→ ‘남성’을 대상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건 오히려 풍류로 치부했다.그 경계에서 사내기생은 사회적 비난을 피하면서도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문화적 해소구였던 셈이다.
④ 예술성과 퍼포먼스의 완성도: 남성 기생의 기능적 장점
흥미롭게도, 사내기생은 단지 대체자로서만 쓰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여성 기생보다 예술적 측면에서 더 뛰어난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체력적으로 유리한 점을 활용해 고난이도 춤을 더 역동적으로 수행
- 성대 구조상, 더 넓은 음역대를 활용한 창(唱)이 가능
- 감정을 ‘억제된 남성성’ 속에서 표현했기에 절제된 미학이 강하게 드러남
또한, 많은 사내기생은 어려서부터 예술 훈련을 받으며 체계적인 기예를 익혔기 때문에,
전문 예술인으로서 기능적 완성도가 높았다.→ 이는 그들을 단순히 ‘여성 기생의 대리자’가 아니라,
→ 독립된 예술 수행자이자 감정의 연기자로 자리 잡게 했다.⑤ 유교 사회의 '감정 금지'와 예술을 통한 우회
조선은 감정을 억제하고, 격식을 중시하는 사회였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직접적인 애정 표현, 감정의 폭발을 극도로 꺼렸다.
하지만 그 억눌린 감정은 예술이라는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 분출되었다.- 춤과 노래는 단지 오락이 아닌, 억제된 감정의 배출구
- 사내기생은 남성이었기에, 남성 사회 내부의 감정 흐름을 자연스럽게 연결
- 이성 간 감정 표현이 허용되지 않는 구조 속에서, 동성 간 정서 표현이라는 회색 지대가 가능해졌다
결국, 사내기생은 조선 사회가 “감정은 억제하되, 표현은 원했던” 이중적 정서를
가장 절묘하게 중재해주는 문화적 존재였던 셈이다.사내기생은 조선의 금기와 욕망 사이에서 탄생한 ‘문화적 해법’이었다
필요의 원인 설명여성 기생의 제도적 제한 궁중·관청 등에서 여성 기생 출입 불가 권력자의 감정 향유 욕구 연회, 풍류 자리에서 예술적 자극 필요 남성 간 정서적 교류의 문화 남색 또는 정서적 애착 표현의 안전한 대리자 예술성과 퍼포먼스 기능 여성 기생보다 높은 수행 역량 감정 억제 사회의 우회적 표현 직접 표현이 불가능한 감정을 예술로 전달 “사내기생은 존재해서는 안 되었지만, 없어서는 안 되었던 조선의 문화적 모순이 낳은 산물이었다.”
3. 젠더 수행자로서의 사내기생: 조선의 'Gender Performer'
― “여성이 아니었지만, 여성의 역할을 했다. 정체성이 아니라 수행이었다.”
현대 젠더 이론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젠더 퍼포먼스(Gender Performance)’**입니다.
이는 생물학적 성(sex)과 사회적 성(gender)을 구분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남성성’, ‘여성성’이라는 정체성이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구성된다는 관점입니다.사내기생은 바로 이 개념을 역사 속에서 ‘몸으로’ 살아낸 인물입니다.
그들은 남성이지만 여성의 역할을 연기했고,
여성 기생과 유사한 복식과 언어, 감정 표현 방식으로
조선 사회의 ‘여성적 문화 욕망’을 충족시켰습니다.그러나 그 연기는 단지 가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조선 사회가 만든 사회적 정체성으로서의 ‘여성됨’을 수행한 것이었습니다.① ‘성별’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요구된 것이었다
조선은 명확한 성 역할 구분을 지향한 유교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예술과 감정, 문화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그 경계가 유동적으로 허물어졌습니다.사내기생은 태어날 때부터 남성이었지만,
그들이 수행한 역할은 전통적인 여성 기생의 그것과 거의 동일했습니다.- 여장을 하고,
- 부드러운 목소리로 감정을 전달하며,
- 남성 관객의 정서를 위로하고,
- 춤과 노래로 연회를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모든 것이 정체성(identity)이 아니라 ‘수행(performance)’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실제 여성은 아니었지만,
‘여성성’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연기했습니다.
이는 곧, 조선 사회가 젠더를 어떻게 ‘실천적으로 규정’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② 복식과 화장: 여성처럼 보여야만 했던 퍼포먼스의 겉모습
사내기생의 복장은 그 자체로 젠더 수행의 시각적 증거입니다.
- 화장을 했고, 머리에 장신구를 달았으며,
- 비파나 단소, 장고 같은 악기를 들고 앉은 자세는 여성 기생과 유사했습니다.
- 의복은 남성의 기본 복식에 여성의 소매 곡선, 색채 조합, 천의 질감 등을 절묘하게 조합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패션이 아니라,
관객이 기대하는 ‘여성적 이미지’를 충족시키기 위한 시각적 기호였던 셈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여자처럼 보이기 위해 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 ‘여성 역할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입은 것’입니다.
→ 이 역시 젠더 수행성의 전형적인 예시입니다.③ 언어와 감정의 표현: 말투마저 연기되었다
사내기생은 단지 외모만 여성적으로 꾸민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사용한 화법, 말투, 감정 표현 방식도 철저히 훈련된 결과물이었습니다.- 완곡한 표현,
- 은유적 언어,
- 겸손하면서도 간간이 위트 있는 화술,
- 시조나 고사 인용을 통해 남성 지식인의 흥미를 자극하는 담화법
이런 기술은 모두 ‘기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회적 정의에 부합하기 위한 수행이었습니다.
→ 말투, 감정의 타이밍, 눈빛의 움직임까지
→ 모두 사내기생이 젠더라는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 몸에 새긴 훈련된 퍼포먼스였던 것입니다.④ 사내기생은 남성성과 여성성의 ‘중첩된 상징’
사내기생의 젠더 수행은 단순한 여성 역할 대행이 아닙니다.
그들은 남성성과 여성성이 교차하고 중첩된 혼성적 상징체로 기능했습니다.- 그들은 남성의 신체를 지녔지만,
- 여성의 정서와 감정을 모방했고,
- 동시에 ‘남자가 여성을 연기한다’는 이중적 인식 속에서 성적 긴장감을 유발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곧 사내기생이 단지 젠더 수행자이자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조선 사회가 감정과 욕망을 투사한 젠더 판타지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뜻합니다.그들의 존재는 사회적으로 묵인된 ‘허용된 여성성’,
또는 **‘남성이 소유할 수 있는 여성성’**의 일종으로 기능하기도 했습니다.⑤ 사내기생은 조선 사회의 ‘젠더 유연성’을 증명한다
사내기생이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 사회는 엄격한 유교 질서를 유지했지만,
문화적 영역에서는 젠더의 경계를 연기할 수 있었고,
그 연기를 통해 새로운 사회적 역할이 탄생했다.”그들은 예외적 존재였지만,
동시에 그 예외성이 필요했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사회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필요로 했고,
→ 정체성은 말할 수 없지만, 수행은 계속되었습니다.결국 사내기생은 조선의 젠더 질서 속에서
정체성을 말할 수 없을 때, ‘수행’을 통해 존재를 증명한 인물들이었습니다.사내기생은 조선 시대 ‘젠더 역할 수행자’의 실존 사례였다
항목 내용젠더 수행의 본질 정체성이 아닌, 사회적 요구에 따른 역할 수행 복식의 의미 여성성과 남성성을 혼합한 시각적 코드 언어·감정의 수행 완곡한 말투와 정서적 감정 연기로 정체성 암시 사회적 위치 제도화되지 않았지만, 문화적으로 필요했던 예외자 현대적 해석 젠더 퍼포먼스 이론의 역사적 실천 사례 “그들은 성별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성별이라는 무대를 매일같이 연기하며 살아낸 배우들이었다.”4. 풍속화, 복식, 악기… 사내기생의 흔적은 문화 속에 남아 있다
― 이름은 없지만, 분명히 거기 있었던 사람들
“기록은 없지만, 존재는 지워지지 않는다.”
조선의 사내기생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공식 사료나 역사서에는 거의 이름조차 남지 않았고,
그 정체성은 말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그들의 흔적을 여전히 문화 속에서 ‘감지’할 수 있다.풍속화 속 익명의 무희,
중성적 장식이 들어간 복식,
성별이 불분명한 악공의 손에 들린 장고(杖鼓) 하나.
이 모든 것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지만, 분명 누군가가 거기 있었음을 증명하는 문화적 흔적’**이다.① 풍속화 속의 무희들: 성별이 묻히고, 역할만 남았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다양한 계층과 직업, 일상을 그림으로 담아낸 귀중한 문화 자산이다.
김홍도, 신윤복 등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에는 종종 춤추는 인물, 악기를 연주하는 인물이 등장한다.그러나 그 인물들의 얼굴은 모호하고, 성별이 명확하지 않다.
특히 다음과 같은 특징들이 사내기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여장을 한 듯한 복장을 한 ‘남성처럼 생긴 무희’
- 여성 무용수와 함께 춤을 추는 ‘동일 복장, 다른 체형’의 인물
- 남성 관객들 앞에서 여성적 자세를 취하며 연기하는 인물
이는 단지 ‘화가의 상상’이나 ‘기생 풍속의 묘사’가 아니다.
사내기생이 실제 활동했기 때문에 그 그림 속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림은 이름을 남기지 않았지만,
현장을 본 화가의 손은 ‘존재를 그려냈다.’② 복식 속에서 발견되는 젠더 혼성의 단서
조선시대 복식 연구에서 사내기생의 흔적은 자주 간과되지만,
의외로 그들의 존재를 암시하는 요소들이 복식사 곳곳에 남아 있다.- 남성용 도포에 여성 기생의 장식 문양이 혼합된 의상
- 소매 끝이나 치마폭에 여성 의복에서만 볼 수 있는 색상 배열
- 허리에 두르는 장신구나 노리개 등 남성이 착용하지 않는 액세서리
- 관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장처럼 치장된 중성 복식
이러한 복식은 단순히 ‘유행’이나 ‘기능’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당시 사내기생이 무대 위에서 수행해야 했던 여성성의 코드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장치였다.→ 복식은 말보다 먼저 그들의 존재를 드러냈고,
→ 시대는 그 시선을 해설 없이 지나쳤다.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 복식이 말해주는 메시지를 다시 읽어야 한다:
“나는 남자였지만, 나에게 기대된 것은 여성으로 보이는 역할이었다.”
③ 악기와 도구: 기능은 기록되었지만, 수행자는 지워졌다
사내기생은 단지 노래하고 춤추는 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정통 악기 연주자이자, 시를 읊고 감정을 전달하는 예술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사용했던 악기와 도구는 대부분 ‘악공의 것’으로 뭉뚱그려져 전해진다.- 장고, 해금, 단소, 비파 등의 악기는 누구나 사용할 수 있었지만,
- 사내기생이 사용했을 경우, 악기의 선택과 연주 스타일은 분명히 달랐다.
- 무용과 창(唱)이 결합된 퍼포먼스를 위한 악기 배치, 장식, 운용 방식은 독특했다.
예를 들어, 해금의 끈 장식이나 비파의 머리 장식은
단순한 기능적 장치가 아닌 퍼포먼스의 일부였으며,
사내기생이 사용했을 때는 더욱 세밀하게 미학적 조정이 가해졌다.→ 그러나 이 모든 디테일은 “악공의 장비”, “궁중 연희용”이라는 일반 명칭 아래 묻혀버렸다.
→ 도구는 남았지만, 수행자는 사라졌다.④ 분장 도구와 장신구: ‘여장’이라는 금기된 수행의 흔적
기생은 화장을 한다. 이는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남성이 화장을 했다는 사실,
특히 무대용이 아니라 '기생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여성적 분장'이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숨겨져 왔다.사내기생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분장 도구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 입술을 강조하는 염료 (연지)
- 눈썹을 여성적으로 보이게 하는 먹과 붓 세트
- 보통 여성에게만 허용된 분장 상자 형태
- 복합적인 장신구 세트 (귀걸이, 머리핀, 노리개 등)
이 도구들은 사치품이 아니라 퍼포먼스를 위한 장비였다.
그리고 이 장비의 존재는 사내기생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신체를 무대 위에서 젠더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분장은 위장이 아니라, 역할 수행을 위한 신체의 재구성이었다.
⑤ 이름은 남기지 않았지만, 문화는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사내기생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들은 기록에서 지워졌기 때문이다.하지만 문화는 기억한다.
그리고 문화는 말하지 않아도, 존재를 담아내는 그릇이 된다.- 풍속화는 그들을 그렸다.
- 복식은 그들이 필요했던 아름다움의 조각을 품었다.
- 악기는 그들이 연주했던 감정의 진동을 지금도 남기고 있다.
- 무대 위 소품, 분장 도구, 의상 장식 하나하나가 그들의 퍼포먼스를 증명한다.
‘사내기생’이라는 이름은 없지만,
그들이 남긴 흔적은 여전히 조선 문화의 구석구석에 살아 있다.5. 조선 사회는 정말 이분법적 젠더만 존재했을까?
― 사내기생이 증명하는 조선의 젠더 질서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조선을 떠올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호한 유교적 위계질서를 바탕으로 한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세계를 연상한다.
남성은 바깥일을, 여성은 집안을 맡으며, 여성은 말을 아끼고 고분고분해야 했다는 그 전형적 이미지.
학교 교육과 대중 역사 콘텐츠에서도 **조선의 성별 규범은 ‘이분법적’이고, ‘고정적’이며, ‘엄격했다’**는 방식으로 설명된다.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그렇게 단순했을까?사내기생이라는 존재는 그 질문에 결정적인 균열을 일으킨다.
그들은 생물학적 남성이었지만 여성 기생의 역할을 수행했고,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수용되었으며,
공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기능’으로 분류되어 활용되었다.즉, 조선의 성 질서는 단순한 남녀 이분법을 넘어서는 유동성과 사회적 필요에 따른 ‘젠더 유연성’을 이미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① 성별 이분법은 이상이었지, 실제는 아니었다
유교 이념은 조선의 공식 이데올로기였다.
성리학은 인간의 도리를 ‘음양의 질서’로 정리했고,
그 질서의 중심엔 ‘남자는 양(陽), 여자는 음(陰)’이라는 대전제가 있었다.- 양은 능동적이며, 밖으로 움직이는 성질
- 음은 수동적이며, 안으로 머무는 성질
그래서 조선은 “남성은 밖, 여성은 안”이라는 **‘내외법(內外法)’**으로 일상의 행동을 규제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았다.- 기생은 여성임에도 남성과 함께 공적 공간에 등장했고,
- 내명부(궁중 여성조직)에서는 여성들이 권력 중심에 자리했고,
- 여성 예인(藝人)은 예술로 사회적 권위를 확보하기도 했다.
- 그리고, 남성인 사내기생은 여성의 역할을 했음에도 그 존재가 일정 부분 허용되었다.
→ 이것은 ‘성별 구분’이 조선 사회에서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조정되는 질서’였음을 보여준다.
② 제도 밖의 사람들: ‘경계 존재’는 항상 있었다
조선 사회는 신분·성별·직업의 구분이 엄격했지만,
언제나 그 경계에서 혼종적인 정체성을 지닌 인물들이 있었다.- 중인 남성으로 악공(樂工)이자 연희자였던 이들
- 무동(舞童)이라 불린 소년 무희들
- 중성적인 복장을 한 궁중 내 악사
- 양반 출신이지만 기생과 사랑을 나눈 예술인들
이들은 모두 사회가 정해 놓은 성별 및 역할 경계를 가로지르며 살아간 사람들이었다.
사내기생도 그 중 하나였다.그들은 여성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중성적 감각’을 수행할 수 있는 문화적 존재로 요청되었다.
그 존재는 애초에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취급되었지만,
사회는 그들을 기능적으로 인정하고, 일정 범위 내에서 수용했다.→ 이렇듯 조선 사회에는 말해지지 않은 ‘경계적 젠더’들이 분명 존재했으며,
→ 이는 고정적 이분법이 실질적으로 완벽히 작동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③ ‘여성성’은 성별이 아니라 기능이었다
사내기생은 생물학적 남성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성성’을 연기했다.
여기서 ‘여성성’은 단순한 외모가 아니라,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역할, 감정 표현, 대화 방식, 분위기 연출 등 문화적 기능 전체를 의미한다.- 부드러운 말투
- 감정적인 공감 능력
- 예술을 통한 분위기 조율
- 외적 아름다움의 연출
이 기능들은 본래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졌지만,
사내기생은 그것을 몸에 익히고, 무대 위에서 완벽히 수행했다.즉, 조선 사회는 실제로는 ‘성별’이 아닌 ‘기능’으로 젠더를 배분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젠더의 ‘기능화’는 현대 젠더이론에서도 중요한 화두이며,
사내기생은 그 이론의 선사례적 실천자였다.④ 감정과 예술은 성별을 넘어야 작동했다
조선은 감정 표현을 금지하거나 억제한 사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중과 상류사회에서는 예술을 통한 감정 순환과 위로가 매우 중요했다.- 슬픔은 시조로 풀고,
- 기쁨은 악기로 표현하며,
- 연회에서는 춤과 노래로 감정이 흐르도록 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기생은 감정의 매개자였고,
사내기생은 그 **‘여성의 역할을 남성의 몸으로 수행한 경계자’**였다.→ 이때, 예술은 성별로 제한되어서는 안 되는 기능이었기에,
→ 조선 사회는 실질적으로 ‘성별 유동성’을 문화적 전제조건으로 삼았던 셈이다.⑤ 사내기생은 존재의 ‘균열’이자 ‘필요’였다
사내기생이 존재했다는 것은
조선 사회가 내세운 젠더 질서가 완벽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자,
동시에 그러한 틀의 ‘균열’을 통해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들은 존재하지 않아야 했지만 존재했고,
이름을 가질 수 없었지만 기억되었으며,
사회는 그들을 말할 수 없지만, 필요로 했다.→ 조선 사회는 겉으로는 단단한 성별 이분법을 유지했지만,
→ 실제로는 그 틀을 무너뜨리는 존재들을 활용해 질서를 유지했다.조선의 젠더 질서는 겉보기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복잡했다
구분 내용겉으로 본 질서 유교 기반의 남녀 이분법, 내외 구분 실제 사회의 모습 성 역할이 상황에 따라 조정됨 젠더 수행의 예 사내기생, 무동, 궁중 악공 등 여성성의 의미 생물학적 성이 아닌 사회적 기능 이중 구조 공식적 금기 + 비공식적 활용 문화적 함의 이분법적 젠더 구도에 내재한 유연성과 예외 “조선은 성별에 따라 살아가야 했던 시대였지만,
예술은 그 틀을 넘어서야만 작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경계에, 사내기생이 존재했다.”6. 오늘날 사내기생을 되짚는 이유
― 말해지지 않았던 존재를 다시 불러내는 일은 왜 중요한가
"잊혔다는 건, 없었다는 것과는 다르다."
사내기생은 바로 그런 존재다.
조선이라는 강고한 유교 질서 속에서,
말해지지 않았고, 기록되지 않았으며,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지만,
분명히 살아 있었고, 사회의 감정과 예술의 흐름 속에서 기능을 수행했던 사람들.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금 이 시점에서,
그들 ― 사내기생 ― 을 다시 소환해야 하는가?단지 흥미로운 역사적 이야기로 소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을 되짚는 일은, 오늘을 이해하고,
우리 사회가 무엇을 말하지 않고 있는지,
어떤 존재를 아직도 경계 밖에 두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만든다.① ‘잊힌 존재’에 대한 복권은 역사 정의의 회복이다
역사는 누가, 무엇을 기록했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진다.
사내기생은 기록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름이 없고, 계보도 없으며, 활동 연대조차 분명하지 않다.하지만 문화와 예술, 시각 이미지, 구술 기록 속에 분명히 그 흔적은 남아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존재하지 않음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삭제되었거나 무시되었다는 것이다.→ ‘말할 수 없었던 존재’를 다시 말할 수 있도록 하는 일.
→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다시 써 내려가는 일.
→ 이것은 단순한 역사 연구가 아니라, 정의의 복원이다.사내기생을 되짚는다는 것은 곧,
기록되지 않은 존재들에게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되찾아주는 일이다.② 젠더 이분법을 넘어서는 감각을 회복하기 위해
오늘날 우리는 성별을 남자/여자라는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기존 시선에서
보다 유연하고 다양하게 이해하려는 시도로 나아가고 있다.- 트랜스젠더, 논바이너리, 젠더퀴어 등 다양한 정체성과 표현이 사회 속에 등장하고 있고,
- ‘여성성’, ‘남성성’이라는 것도 고정된 특성이 아닌 문화적 수행이라는 인식이 자리잡아가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사내기생은
조선 시대에 이미 존재했던 ‘젠더 퍼포머’,
즉 생물학적 성별과 다른 역할을 수행했던 정체성의 전조로 다시 해석된다.→ 그들은 트랜스젠더도, 퀴어도 아니지만,
→ 사회가 강요한 성별 역할의 경계를 ‘연기로 돌파’했던 존재였다.이 존재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은,
오늘날 성소수자 담론의 역사적 뿌리를 확장하고,
단절된 것처럼 여겨졌던 다양성의 흐름을 재구성하는 일이 된다.③ 감정의 역사, 정서의 문화사를 회복하는 통로
조선 사회는 감정을 억제하는 사회였다.
하지만 억제된 감정은 반드시 다른 통로를 통해 표출된다.
그 통로가 바로 기생이라는 존재,
그중에서도 여성 기생이 부재한 공간에서는 사내기생이었다.그들은 남성 주류 집단 속에서
‘여성적 감수성’을 연기하며, 감정의 흐름을 만들어주는 정서 조율자였다.→ 조선 시대의 풍류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 억제된 사회적 감정을 문화적으로 해소하는 장치였다.
→ 사내기생은 그 감정의 흐름을 가능케 했던 숨겨진 장치였다.오늘날 감정이 억압되거나 관리되는 사회 구조 속에서,
그들의 존재는 감정의 문화사, 정서의 정치학을 돌아보게 한다.④ 예술사의 누락된 주인공, 퍼포먼스의 기원
예술사에서 ‘기생’은 종종 예인(藝人)으로서 조명되지만,
그 대다수가 여성으로 상정되어 있다.하지만 사내기생이 분명히 존재했고,
그들은 시조를 읊고,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했다.
때로는 여성보다 더 절제된 표현과 숙련된 연기로 감정의 깊이를 더했으며,
그 예술적 퍼포먼스는 궁중 연회나 사대부 집안에서 무대를 완성시키는 핵심 요소였다.→ 예술은 성별로 구분되지 않는다.
→ 사내기생의 존재는 조선 예술사가 얼마나 많은 퍼포머를 잊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오늘날 다양한 성 정체성과 성 표현을 가진 아티스트들이 무대에 서고 있는 시대에,
그 뿌리가 ‘아주 오래 전 조선’에도 있었음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역사적 가치가 크다.⑤ ‘경계인’을 이해하는 사회는 더 강하다
사내기생은 조선 사회가 만든 젠더, 신분, 감정, 역할의 모든 경계선 위에 서 있었다.
- 남성임에도 여성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고,
- 예술가이지만 이름 없는 존재였으며,
- 필요하지만 공식화될 수 없는 문화적 장치였다.
오늘날 우리는 ‘경계인’들을 마주하고 있다.
- 성소수자,
- 다문화 가정,
- 직장과 가정 사이에서 정체성이 중첩된 사람들,
- 사회 시스템 밖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존재들
이들을 이해하는 감수성은
과거의 경계인들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사내기생은 단지 조선의 특이한 문화가 아니라,
→ 오늘날 경계에 선 사람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시선의 훈련장이 될 수 있다.사내기생은 조선이 품고 있었던 젠더 다양성의 은밀한 증거였다
구분 내용실존성 왕실과 관청 기록, 그림, 복식 등에서 추적 가능 역할 예술, 감정 매개, 젠더 퍼포먼스 사회적 위치 공적이지만 공식적으로는 부정된 존재 의미 성 역할 이분법의 경계를 넘나든 문화적 경계인 현대적 해석 젠더 다양성의 역사적 선례, 퀴어 문화의 전근대적 표현 '조선 시대 ‘사내기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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