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 기록의 바깥에서 춤추던 경계인, 잊힌 조선의 초상
1. 우리가 몰랐던 조선, 그 이면의 얼굴
― ‘유교의 나라’라는 단일 이미지 너머에 존재한 문화의 다층성
❝ 조선은 정말 그렇게 단순한 나라였을까? ❞
우리는 교과서를 통해 조선을 배웠다.
유교국가, 사대부 중심 사회, 엄격한 예절과 도덕을 중시한 시대.
조선은 마치 일관되고 단정한 문화 질서 속에서 살아간 단색의 사회처럼 인식된다.-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 여자는 안에서 살림을 돌보고,
- 지배층은 예를 갖추고 백성은 충직하게 살아간다.
이러한 ‘정제된 조선’의 이미지 속에서는, 사회가 정해 놓은 역할에서 벗어난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는 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조선은 말해지지 않은 존재들, 주변화된 인물들, 이름조차 기록되지 못한 문화적 경계인들이 함께 살아간 복합적 사회였다.역사란,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가’로도 읽을 수 있다
조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이것이다:
"조선은 무엇을 기록했고, 무엇을 말하지 않았는가?"
조선은 조선왕조실록, 의궤, 승정원일기 등 방대한 양의 공적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들은 어디까지나
국가 권력의 시선에서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만을 남긴 결과이다.여기서 말해지지 않은 존재들, 예를 들어:
- 여성 무속인
- 남장을 한 여성
- 성 역할의 경계를 넘나든 예술인
- 사내기생
이들은 ‘말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로부터 지워졌다.
그러나 그들이 말해지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비가시적 존재를 증명해주는 아이러니가 된다.사내기생은 ‘이면의 조선’을 보여주는 키워드
‘사내기생’은 우리가 몰랐던 조선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창문이다.
그들은 남성이었지만 여성의 복장을 하고, 여성적 감정과 정서를 무대 위에서 표현했다.
그리고 그 표현은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정식 예술로 받아들여졌다.사내기생의 존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능하게 한다:
- 조선에도 성 역할이 유연했던 문화적 공간이 존재했는가?
- 유교 질서 바깥에서 살아간 이들은 어떻게 기억되고 지워졌는가?
-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이 축소되거나 배제되었는가?
즉, 사내기생은 단지 과거의 특이한 사례가 아니라,
조선이 단일한 성 역할 구조만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문화적 증거인 셈이다.‘정상’의 틀 밖에서 살았던 사람들
조선의 이면에는 수많은 **‘경계인’**이 존재했다.
- 양반이지만 예술에 심취해 제도에서 이탈한 사람
-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남장하고 글을 쓰거나 싸웠던 이들
- 사대부가 아닌 하층민이지만 시조를 읊던 사람들
- 사내기생처럼, 사회가 규정한 성별 경계를 뛰어넘은 인물들
이들은 기록된 ‘중심’의 역사가 아니라,
말해지지 않음으로써만 존재를 드러낼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통해,
조선이라는 사회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유연하며,
때로는 지금보다도 더 다양한 정체성이 허용되었던 공간이었음을 깨닫는다.조선의 문화 다양성은, 그 이면에서 살아남았다
조선은 틀에 맞춰진 사회인 동시에,
그 틈을 비집고 다양한 존재들이 피어나던 사회였다.- 무속과 불교가 공존했고,
- 사대부의 글 속에 욕망과 풍류가 담겼으며,
- 공적인 예술의 뒤편에서는 성별이 유동하는 퍼포머들이 존재했다.
사내기생은 바로 그 이면의 문화, 주류 서사 너머의 조선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들을 다시 말하는 일은 곧,
조선이라는 시대를 더 풍부하고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2. 사내기생이란 누구인가?
― 남성으로 태어나 여성의 예술을 수행한 경계적 존재
“남자인데 기생이었다고요?”
사내기생(舍內妓生)이라는 말은 처음 들었을 때 다소 생소하거나 혼란스럽게 들릴 수 있다.
기생은 흔히 여성 예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남성으로 태어나 여성의 역할과 예술을 수행한 기생들이 분명 존재했다.
이들이 바로 ‘사내기생’이다.사내기생은 단순히 ‘남성 기예자’나 ‘남자 무용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여성적 외양과 태도, 감성 표현을 훈련받고 이를 예술로 구현했던 존재였다.
또한, 여성 기생이 출입할 수 없는 연회, 사대부 공간, 궁중 등에서
정서적 소통과 예술적 감흥을 담당하는 특별한 예인으로 기능했다.기록과 흔적은 존재하는가?
“그들이 실제로 있었던 걸까요?”
의심은 자연스럽다. 사내기생은 교과서에도, 사극에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몇 가지 자료와 문화적 흔적이 그 실존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풍속화 속 익명의 무희들
신윤복의 일부 풍속화에는 여성복을 입은 듯하지만 남성처럼 생긴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엄격한 조선 회화 양식에서 ‘젠더 모호성’을 암시하는 존재로 해석된다.✔ 구술자료와 민속 기록
조선 후기, 특히 병영이나 왕실 내 사적인 연회에서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 남자더라”는 식의 전언이 지역 민속 전승이나 구술채록 자료에 종종 등장한다.✔ 문헌 속 단편적 언급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의 일부 문서에서는
‘남자 무희’, ‘소년 무용수’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 발견되며,
이들이 여장을 하거나 여성 기예를 수행했다는 언급이 간접적으로 담겨 있다.즉, 사내기생은 공식 서사의 바깥에 있었지만, 문화의 그림자 속에 존재했던 실존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어떤 활동을 했는가?
사내기생은 단순한 연희자가 아니었다.
그들의 활동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 영역을 포괄했다.활동 영역 내용무용 부채춤, 승무, 검무 등 여성 기생이 하던 춤을 그대로 수행 가창 시조, 가곡, 민요 등을 부르며 청중과 정서적 교감 접대 고위 관료, 외국 사신, 왕 앞에서 분위기 조성 및 감흥 유발 교양 연희 문답, 시 짓기, 장기 두기 등의 지적 오락 제공 복식 연출 여성 복장을 모방하여 전통의상과 머리 장식 등을 착용 이처럼 그들은 단지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이 아닌,
‘성별을 연기하는 문화적 퍼포머’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남성도, 여성도 아닌 존재?
사내기생은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었지만,
사회적 역할과 예술 수행에서는 여성의 자리를 수행했다.- 그들은 여장을 했고,
- 여성 기생처럼 말하고 행동했으며,
- 감정을 여성적으로 표현하도록 훈련받았다.
이러한 특징은 오늘날의 개념으로 본다면
‘젠더 퍼포먼스’, 혹은 **‘퀴어적 존재’**에 가까울 수 있다.그들은 당시 유교적 질서에 도전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질서 안의 빈틈을 채우는 방식으로 존재했기에 허용되었으며,
동시에 그 허용은 ‘제도 안의 주변’으로서 제한적이고 조건적이었다.사내기생이 지닌 상징성
사내기생은 단순한 문화적 기현상이 아니다.
그들의 존재는 조선이라는 사회가 성 역할, 예술, 제도의 경계가 복잡하게 얽힌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그들은 다음의 세 가지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 전통문화 속 젠더 유연성의 실천자
→ 전통이 반드시 경직된 성 이분법만을 고집한 것이 아님을 증명 - 사회적 빈틈을 메운 제도적 존재
→ 여성 기생의 출입이 불가한 공간에서 ‘예술적 대체자’로 기능 - 말해지지 않은 역사의 아이콘
→ 공식 역사에 편입되지 못한 ‘지워진 존재’를 상징
사내기생은 누구였는가?
사내기생은 조선이라는 질서 안에서
‘남성의 몸을 가졌지만 여성의 역할을 수행했던 예술가’이며,
‘성 역할을 넘나들며 문화적 표현을 담당한 퍼포머’였다.그들은 전통문화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존재였고,
그들을 다시 말하는 일은 조선의 문화다양성을 복원하는 첫 걸음이 된다.3. 왜 조선은 사내기생을 필요로 했을까?
― 여성의 자리를 남성이 대신한 사회적 풍경
필요는 문화를 낳는다: 사내기생의 탄생은 우연이 아니었다
역사는 종종 ‘기이한 현상’으로 포장된 존재들 속에서,
실은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회적 요구를 발견하게 만든다.사내기생 역시 그렇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문화적 예외가 아니라,
조선 사회가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물이었다.“왜 남자가 기생 역할을 해야 했을까?”
그 질문의 배경에는 조선의 제도, 성 역할 규범, 문화 욕망의 구조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1 여성 기생이 들어올 수 없었던 공간들
조선은 유교적 질서가 엄격하게 작동한 사회였다.
여성의 신체와 존재는 공간적 이동 자체가 제약되었고,
특정 장소, 특히 국가기관이나 왕실 연회에서는 여성 출입이 원칙적으로 불허되었다.대표적 공간
- 궁중의 내부 연회
- 병영 내 위안 연회
- 사신 접대용 관아 의례
- 왕세자와의 밀접한 접객 공간
이처럼 여성 기생이 공식적으로 초대되거나 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음악과 연희, 정서적 교류가 여전히 필요했다면?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등장한 존재가 바로 사내기생이었다.
2 조선 사회는 ‘예술’ 없이는 운영되지 않았다
예술은 조선 사회의 공적/사적 생활에서 결코 부차적이지 않았다.
특히 **시·서·화·가무(詩書畵歌舞)**는 사대부의 교양의 정점이자,
왕실과 관청에서 ‘격’을 갖추는 방식이었다.- 국왕이 사대부를 접대할 때
- 외국 사신을 맞이할 때
- 전쟁 후 장수를 위로할 때
- 학문 토론 후 교유의 정서를 나눌 때
이 모든 장면에 **‘예술적 접객’**이 요구되었으며,
그 감성적 접점은 단순한 정치적 장치가 아닌, 문화적 정당성의 구성 요소였다.여성 기생 없이도 예술적 흥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
그러면서도 여성성을 대리 수행할 수 있는 인물.
바로 사내기생이 그 자리를 채웠던 것이다.3 남성 전용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아이러니
조선은 분명 ‘남성 중심 사회’였다.
그러나 이 남성 중심 구조가 오히려 남성에게
‘여성적 정서와 교류’를 필요로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외로운 지방관의 일상
- 전쟁 중 병사들의 심리적 위안
- 장거리 사행 중 외국 접대의 ‘품격 유지’
이런 맥락에서 ‘여성’의 역할이 필요했지만,
실제 여성을 불러들이는 것은 도덕과 체제의 위반이었다.
그래서 남성 안에서 ‘여성 역할을 흉내내는’ 존재가 탄생한 것이다.다시 말해, 사내기생은
“여성을 부를 수 없지만, 여성의 존재가 필요한 남성사회”가
스스로 만들어낸 문화적 역설이다.4 대체의 논리: 여성 기생의 ‘그늘’을 채우는 존재
조선 후기에는 여성 기생조차 그 수와 이동이 제한되었고,
공식 의례 외에는 '천인' 계급으로 차별받았다.
지방 관청이나 외딴 병영에서 고급 예능을 갖춘 여성 기생을 배치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이에 따라 등장한 것이 바로 **‘남성인데 여성처럼 행동하고 예술을 수행할 수 있는 자’**이다.
그는 보다 쉽게 훈련시킬 수 있고, 위계적으로 통제 가능하며,
여성보다 더 '안전하게' 관리될 수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여성을 부르지 않고도 예술을 선보일 수 있고,
- 사회 윤리를 위반하지 않으며,
- 정서적 기능은 동일하게 수행 가능하다.
이러한 ‘문화적 대체 시스템’으로서
사내기생은 유교 질서 안에서 허용된 제한적 예외였다.5 위계적 연회와 ‘격조’의 연출자
사내기생은 단지 흥을 돋우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대부나 외국 사절을 상대할 때,
조선의 문명적 위엄과 정서적 세련됨을 보여주는
‘문화 외교의 퍼포머’ 역할을 했다.- 고운 복장, 정중한 말투, 시·가·무의 수준 높은 연기
- 여성적 유연함과 남성의 훈련된 태도를 동시에 갖춘 자
- 무례하지 않되, 감흥을 자아내는 미묘한 경계 수행자
이는 조선 사회가
정치적으로는 유교 중심의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문화적으로는 다양한 정체성과 표현을 포용했던 아이러니한 구조를 보여주는 단서다.사내기생은 필요로 인해 ‘생산된 존재’였다
구조 역할여성 출입 금지 공간 사내기생이 여성 대리자로 배치됨 남성 중심 문화의 감성 결핍 사내기생이 정서적 교류를 가능케 함 연회의 문화적 위계 유지 사내기생이 격을 연출함 유교 윤리의 제약 남성 예인의 형태로 성 역할을 대체함 사내기생은 ‘정상적이지 않은 예외’가 아니라,
당시 사회의 문화, 제도, 윤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필연적 존재였다.그들의 등장은 곧,
조선이라는 사회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고,
예외를 수용하며, 문화적으로 유연한 방식으로 작동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4. 조선은 정말 성별 이분법만 존재했을까?
― 겉은 유교적 이분법, 속은 다층적 성 정체성
'남성과 여성' 그 이분법은 어디까지나 이념이었다
조선은 흔히 성별 이분법의 대표적 시대로 여겨진다.
남자는 글을 읽고 나라를 다스리며 바깥일을 하고,
여자는 안에서 자녀를 돌보고 덕을 쌓아야 한다는 유교 윤리.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구조가 이념적 질서였을 뿐,
사회 전체를 구성하는 모든 현실이 그렇지는 않았다는 점이다.이분법은 ‘이상적 규범’이었지, 모든 사람의 삶을 규정할 수는 없었다.
현실의 조선은 훨씬 더 복잡했고, 성 역할의 경계는 생각보다 유연했다.문헌 속 질서 vs. 민간 속 실천
조선시대의 공적 문헌에는 유교적 도덕 규범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삼강오륜》, 《소학》, 《여훈》 등에는 여성의 내조와 순종,
남성의 권위와 주도권이 강조된다.하지만 민속, 예술, 구비문학, 풍속화 등 민간의 문화적 층위를 살펴보면
이러한 이분법이 얼마나 자주 넘나들어졌는지 확인할 수 있다.예시 1 | 무속의 세계
- 여성은 공식적 권한은 없지만, 마을의 **샤먼(무녀)**으로 활약했다.
- 남성도 무속인이 되었으며, 때론 여성적 복장을 하고 신을 모셨다.
- 이 과정에서 성별 경계가 의식적·종교적으로 넘어졌다.
예시 2 | 연희와 예술
- 탈춤과 판소리에서는 남성이 여성 역할을 수행하거나,
- 반대로 여성이 남성적 에너지를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 이는 성별 경계가 ‘연기’를 통해 사회적으로 수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예시 3 | 풍속화와 생활상
- 신윤복의 그림 속에는 남장을 한 여성, 중성적 외모의 인물들,
성적 역할이 혼재된 장면이 다수 등장한다. - 조선의 성적 문화와 젠더 감각이 겉으로 알려진 만큼 폐쇄적이지 않았다는 시각이 점점 힘을 얻고 있다.
사내기생, 그 경계성의 상징
이처럼 조선의 성별 질서가 현실과 어긋나는 지점에서 등장하는 대표적 존재가 바로 사내기생이다.
사내기생은 남성이면서도 여성의 역할을 했고,
남성 사회 내에서 여성적 감성과 연기를 담당하며
유교적 이념의 빈틈을 메우는 존재로 기능했다.- 여성 기생이 출입할 수 없는 연회장이나 병영
- 왕실 내부의 ‘엄숙한 예술’ 공간
- 감정적 정서를 필요로 하는 남성 세계
이러한 공간에서 사내기생은
단지 예외적인 인물이 아니라, 제도의 공백을 메우는 공식적 존재였다.실질적인 '제3의 성 역할'
조선에는 ‘법적으로’ 제3의 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그리고 역할 수행의 층위에서는
실질적인 제3의 젠더 수행자들이 다수 있었다.유형 설명사내기생 남성으로 여성 역할 수행, 예술과 접객 담당 무속인 신내림을 통해 젠더 전환적 수행(특히 남성 무당) 남장 여성 사회적 제약을 뚫고 활동한 실제 인물 존재(의녀, 사상가 등) 탈춤 배우 여성 캐릭터를 남성이 연기하며 감정 표현의 중성성 연출 이들은 법적 성별은 고정되어 있었지만,
사회적 기능과 수행에서 젠더 역할의 혼합 혹은 전환을 보여줬다.
그 결과 조선은 ‘겉으로는 이분법적, 속으로는 복합적’인 구조를 지닌 사회가 되었다.유교 질서조차도 완벽하진 않았다
유교는 조선을 통치하는 이념이었지만,
현실의 조선은 그 이념만으로 유지되지는 않았다.- 술과 풍류를 즐기는 사대부
- 외설적 이야기를 주고받는 민간 구비문학
- 사랑과 연정을 주제로 한 가사문학과 판소리
- 중성적 이미지가 등장하는 예술과 놀이문화
이러한 요소들은
조선이 제도적으로는 금욕을 강조했지만,
문화적으로는 다양한 감정과 정체성을 은밀하게 허용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조선은 단순하지 않았다
구분 겉으로 보이는 조선 실제 조선의 모습성별 질서 남성=공적, 여성=사적 역할 경계 유연함 젠더 표현 이분법적 고정 연희·무속에서 성별 전환 기생의 존재 여성 중심 사내기생 등 남성 기생도 존재 문화적 다양성 억제 민간 문화에서 유연하게 표출 결국, 조선은 단순한 유교국가가 아니었다.
사내기생이라는 존재를 통해, 우리는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 타협하며 형성된 또 다른 조선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5. 젠더 수행자, 문화적 중성의 상징
― 성별을 연기한 이들이 드러낸 조선의 또 다른 가능성
사내기생은 단지 '남자가 여장을 한 존재'가 아니다
사내기생이라는 존재를 단순히 “남자가 여장을 한 것”쯤으로만 해석한다면,
그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여성 옷을 입고 춤을 춘 것이 아니라,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던 감정, 태도, 예술을 ‘수행’한 존재였다.이 ‘수행(performance)’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젠더 연구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인 **젠더 퍼포먼스(gender performance)**는
젠더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과 규범에 따라 수행되는 것이라는 개념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사내기생은 조선의 젠더 퍼포머였으며,
단순한 예외가 아니라 그 시대의 젠더 구조의 가능성을 드러낸 상징적 존재였다.조선의 유교 질서 속 '연기된 여성성'
조선은 엄격한 유교적 성 규범에 의해 성 역할이 규정된 사회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질서 속에서 여성 역할을 남성이 연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사내기생은 바로 그 틈에서 탄생한다.- 궁중 연회, 병영, 외교 의전과 같이 여성 출입이 제한된 공간에서
- 감성적 위로와 정서적 교감, 예술적 연출이 필요했고
- 이를 남성이 '여성처럼' 수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유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유교적 성 역할을 교란해야 하는
문화적 딜레마 속에서 사내기생은 등장했다.그들의 존재는 조선 사회가
외형적으로는 ‘성별 이분법’을 강조했지만,
실제 문화적으로는 그것을 유연하게 조정하고 연기할 수 있었던 공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감정을 연기하고, 역할을 넘어서다
사내기생이 수행한 것은 단순한 춤과 노래가 아니었다.
그들은 여성 기생이 맡았던 감정 연출, 분위기 조성, 공감의 수행을 그대로 담당했다.
즉, 남성의 몸으로 여성의 언어와 감성을 무대 위에서, 그리고 사회 속에서 구현한 것이다.수행 역할 내용정서적 공감 가사와 시조를 통해 감정을 나누는 연기 여성적 언행 여성 특유의 말투, 손짓, 눈빛 등을 표현 문화적 기교 악기 연주, 무용, 시 낭송 등 고급 예술 수행 접객과 예의 여성 기생처럼 상대를 배려하고 정중하게 응대 이러한 수행은 단순한 예능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허용된 감정 노동자이자 감성 연출자'로서의 역할이었다.
사내기생은 자신의 정체성을 사회 규범에 맞춰 연기하며,
그 자체로 성별 경계의 유동성과 사회적 합의 가능성을 드러낸다.'여성성'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드러내다
현대 젠더 이론은 젠더를 타고나는 생물학적 속성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학습되고 재현되는 것으로 본다.사내기생은 바로 그 대표적 사례다.
그들은 여성의 옷을 입고, 여성의 언어를 사용하며, 여성의 감정을 연기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술로, 정서 교류로, 접객의 기술로 수행함으로써
사회가 기대하는 여성성의 '합의된 모습'을 구현해냈다.이 말은 곧,
여성성이란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사회가 누군가에게 수행하길 바라는 역할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사내기생은 이러한 사회적 역할 수행의 가능성과 복잡성을
조선이라는 시대 속에서 이미 구현하고 있었던 셈이다.문화적 중성이라는 개념
사내기생은 남성과 여성,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았다.
그들은 남성의 신체를 지녔지만, 여성적 감정과 예술을 수행했고,
그 역할 수행을 통해 성별을 넘나드는 **문화적 중성(metagender, or cultural androgyny)**의 위치에 있었다.이런 ‘문화적 중성성’은 조선이 결코
단선적인 성 역할 사회만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무속의 세계에서 여성과 남성이 신령과 합체하며 성을 넘나들고,
- 탈춤과 창극에서 성별이 뒤섞인 캐릭터들이 중심이 되며,
- 예술, 놀이, 감정 표현의 장에서는
성보다 감성이 더 중요한 기준으로 작동했다.
사내기생은 바로 그 중성의 경계선에 선 예술가이자, 사회적 연기자였다.
사내기생은 조선 젠더 질서의 균열 속 예술적 증거
의미 설명젠더 퍼포머 사회가 요구하는 성 역할을 연기한 존재 문화적 중성 성별 이분법을 넘는 감정과 표현을 구현 유교 질서의 역설 여성 기생은 금지되었으나, 여성 역할은 필요했던 구조 사회적 허용선 도덕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감성 욕구를 충족시킨 대안 젠더 다양성의 흔적 조선 시대에도 존재했던 성별 유연성의 문화적 증표 사내기생은 단지 옛날의 예외적 인물이 아니라,
오늘날 성 역할과 정체성의 유연성을 바라보는 데 있어 소중한 역사적 거울이다.
그들은 젠더와 문화 사이의 ‘틈’을 살아간 인물로서,
우리가 ‘정상’이라 불러온 것의 경계를 해체해주는 존재였다.6. 말해지지 않은 존재, 지워진 기록
―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말할 수 없어서’ 잊힌 사람들
역사란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지우는가?
우리는 흔히 역사를 "있었던 일을 남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 역사란 **‘기억하고자 선택한 것들의 모음’**에 가깝다.
그렇다면 반대로, 말해지지 않은 것들, 기록되지 않은 존재들은 정말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기록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답은 단연코 아니오다.
기록에서 지워진 존재들—예를 들어 사내기생, 여성 무속인, 남장을 한 여성, 혼혈인, 비문자적 계층—이야말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말하고 싶지 않았던 ‘또 다른 진실’일 수 있다.‘말하지 않음’은 선택이며, 동시에 권력이다
기록은 언제나 권력의 언어로 쓰인다.
조선의 공식 기록물—『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은 대부분 지배계층 남성의 시선으로 작성되었다.
이 기록들은 국가가 인정한 사건과 인물, 제도만을 역사로 남겼고,
그 외의 사람들, 특히 제도 바깥의 존재들은 침묵 속에 묻혀버렸다.대표적 배제 대상
대상 배제 이유사내기생 성 역할 규범에 어긋남 여성 무속인 공식 종교가 아님 남장 여성 남성 권위에 대한 위협 성소수자적 인물 유교 이념에 부적합 하층 계급 ‘역사 주체’로 인정받지 못함 이처럼 말해지지 않은 존재들은
역사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된 존재들이며,
그 배제의 구조는 권력, 도덕, 질서 유지의 논리와 깊이 맞닿아 있다.조선은 말하지 않음으로 통제했다
조선은 유교적 질서 아래에서 통치를 이어간 왕조였다.
이 질서의 핵심은 질서 유지와 도덕성의 외형 유지였다.
그러므로 사내기생처럼 젠더 경계를 넘는 인물들은
‘드러나면 곤란한 존재’, 즉 공공연히 언급되면 체제를 흔들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었다.사내기생은 이런 존재였다:
- 남성이지만 여성의 언어와 태도를 흉내 내고,
- 여성처럼 예술을 수행하고 감정을 연기하며,
- 남성들 사이에서 감성적 교류를 담당했다.
이런 역할은 문화적으로는 필요했지만,
**도덕적으로는 인정하기 어려운 ‘회색지대’**였기에,
사내기생은 공식 기록에서 가능한 한 지워지거나 침묵되었다.‘존재’는 했으나 ‘이름’은 없었던 사람들
사내기생을 비롯한 많은 경계적 존재들은 실제로 존재했지만 이름을 갖지 못했다.
혹은 기록되었더라도 실명 없이 익명화되어,
“그는 소년이었다”, “기생처럼 노래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이가 춤을 추었다”라는 식으로만 등장한다.이러한 익명화는 단순한 정보 누락이 아니라,
제도적·의도적 무시의 결과이며,
그 자체로 사회가 그 존재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말해준다.‘지워졌다는 것’은 곧 ‘존재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역사에서 말해지지 않은 존재들은 아예 없었던 것보다
‘무언가를 말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지운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풍속화 속 모호한 인물
- 민요와 판소리에 드러나는 성별 전복 캐릭터
- 구전되는 사내기생에 대한 단편적 전언
- 의례 문서에 실명 없이 ‘무희’로만 등장하는 존재들
이런 조각들은 역사에서 지워진 이름들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암시하는 문화적 잔재들이다.
그리고 이 잔재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그들을 다시 말하고 되살려야 할 근거이자 단서다.사내기생은 ‘지워진 역사’의 대표적 사례
구분 내용존재 여부 실존했으나 기록은 미미하거나 익명 지워진 이유 유교적 성 질서와 국가 도덕 기준 위반 우려 문화적 역할 감성의 연출자, 젠더 수행자, 문화적 완충지대 기록 방식 익명화, 은유적 표현, 민속과 예술에만 남음 복원 필요성 조선 사회의 젠더 다양성과 문화적 다층성 해석에 필수 말해지지 않은 존재를 말하는 일, 그 자체가 역사 쓰기다
사내기생을 다시 조명하는 것은 단지 옛날 특이한 인물을 발굴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말해지지 않은 과거를 복원하고,
그 침묵의 의미를 다시 묻는 ‘역사의 재구성’ 행위다.지금 우리가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존재를 상상하고, 의미를 되새기는 그 순간,
말해지지 않았던 존재는 다시 말해지는 존재로, 지워진 기록은 새롭게 쓰이는 역사로 바뀐다.7. 오늘날, 왜 우리는 사내기생을 다시 말하는가?
― 침묵 속에서 사라진 이름들을 불러내는 일의 의미
과거를 복원하는 것은 ‘현재’를 다시 이해하는 일
사내기생은 조선이라는 이름 아래 제도 바깥, 기록 바깥, 언어 바깥에 머물렀던 존재였다.
그들은 있었지만 이름이 없었고, 보였지만 말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왜 그들을 다시 말해야 할까?그 이유는 단순히 ‘역사적 흥미’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존재를 통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구조와 인식의 한계를 되묻고,
다시 쓸 수 있는 역사와 문화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1. 역사는 권력의 이야기였다 – 이제는 ‘침묵한 자’의 이야기로
지금까지의 역사는 대부분 기록을 남긴 자들의 시선으로 쓰였다.
왕, 지배층, 남성, 사대부 중심의 서사가 주류였고,
그 외의 사람들—여성, 하층민, 성소수자, 무속인, 기녀, 사내기생—은 역사에서 배제되거나 익명화되었다.사내기생은 그 구조 안에서 ‘말해지지 않는 자’였고,
지금 우리가 그들을 다시 말한다는 것은
그동안 침묵시켜온 존재들을 역사에 복원하는 일이다.이는 단지 한 인물군에 대한 재조명이 아니라,
역사라는 구조 자체를 누가 쓰고, 누가 말하고, 누가 침묵하는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지는 문화 비평의 행위다.2. 젠더 이분법을 넘어선 조선 – 성별 유연성의 역사적 실마리
사내기생을 다시 말하는 일은 현대 젠더 논의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현대 사회는 성별 이분법을 넘어, 성 정체성과 젠더 표현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이를 ‘최근의 변화’로만 보려 한다.사내기생은 이 흐름에 반례이자 증거가 된다.
그들은 조선이라는 전통사회 속에서,
남성의 몸으로 여성의 감성·언어·예술을 수행한 존재였고,
이는 곧 ‘성별 역할’이 본질적이지 않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드러낸다.다시 말해, 사내기생은 “전통 속에도 젠더 다양성은 존재했다”는 역사적 실마리다.
이는 오늘날의 젠더 인식이 단절적 혁신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축적된 ‘다양성의 흔적’ 위에 서 있음을 증명해주는 단초다.3. 예술가로서의 사내기생 – 감정과 정서를 연기한 존재들
사내기생은 단지 성 역할을 전환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여성처럼 보이기 위해’만 여장을 한 것이 아니라,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던 감정의 교류, 정서의 연출, 예술적 표현을
남성의 몸으로 수행한 감성적 예술가였다.- 가곡과 시조를 부르며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 부채춤과 승무로 감정의 절정을 표현하고,
- 문객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문화적 정서’를 함께 나눴다.
이 모든 활동은,
그들이 단순한 연희자가 아닌, 감정 노동자이자 정서 연출자로서
당대 문화의 감성적 층위를 담당했다는 것을 말해준다.오늘날 감정 표현이 억눌리는 사회 속에서,
사내기생은 오히려 감정을 해방시키고, 다르게 연기한 예술의 상징으로 돌아올 수 있다.4. '지워진 존재'를 말하는 것은 윤리적 책임이다
사내기생은 단지 “잊힌 인물”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지워진 존재였다.
그들이 기록되지 않은 이유는 ‘하찮아서’가 아니라,
사회가 말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교 윤리상 불편한 존재였고,
- 남성 중심 권력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계인이었으며,
- 공공연히 언급되면 ‘질서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런 존재들을 다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말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라졌다고 말할 수 없다.”
“존재했지만 지워졌다는 사실은, 우리가 지금 그것을 다시 말할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이것은 단지 ‘역사적 흥미’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와 인식의 윤리에 관한 문제다.사내기생을 말한다는 것의 5가지 현재적 의미
의미 설명1. 역사 복원 침묵 속에서 사라진 존재들을 다시 역사로 되돌리는 작업 2. 젠더 다양성 증거 조선 시대에도 성별 경계가 유연했음을 보여주는 실례 3. 문화적 중성성 감정과 정서를 예술로 연기한 중성적 퍼포머 4. 기록의 정치성 비판 누가 역사에 남고, 누가 지워지는가에 대한 성찰 5. 오늘의 질문 지금 우리는 어떤 존재들을 말하지 않고 있는가? 지금, 그들의 이름을 다시 부르는 이유
사내기생을 다시 말하는 일은,
사라진 과거를 되살리는 동시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만든다.그들은 경계 위를 걷던 존재였고,
이제는 기억과 언어의 경계에서 다시 불리는 중이다.그리고 그 이름을 다시 부르는 우리는,
단지 과거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우리가 앞으로 어떤 사회를 기억하고,
누구를 말하며,
어떤 존재를 잊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사내기생은 조선의 문화 다양성을 비추는 거울이다
사내기생은 단지 과거의 특이한 예인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시대의 경직된 틀 속에서도 유연하게 작동하던 문화적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그들의 존재는 조선이 결코 단일한 문화만을 가진 사회가 아니었으며,
다층적인 정체성과 젠더 유연성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지금 우리가 사내기생을 다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야말로 “또 다른 조선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오늘의 우리를 더 넓고 깊게 만드는 거울이 된다.'조선 시대 ‘사내기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내기생이란?조선 남자 기생의 실체를 들여다보다 (1) 2025.06.26 조선시대에도 존재했던 성 역할의 유연성, 사내기생 이야기 (0) 2025.06.26 기록되지 않은 역사, 조선의 사내기생을 다시 읽다 (1) 2025.06.24 조선의 젠더 경계에 선 존재, ‘사내기생’을 아시나요? (1) 2025.06.24 조선에도 남자 기생이 있었다? 사내기생의 숨겨진 역사 (0) 2025.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