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야의 조선시대 '사내기생'

조선 시대 ‘사내기생’

  • 2025. 6. 27.

    by. 유니야15

    목차

      한류 사극 속 기생은 언제나 고운 한복을 입은 여인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분명히 '남성 기생', 즉 남자 예인(藝人)들이 있었다. 이들은 조선의 무대를 누비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귀족과 왕족을 즐겁게 했다. 오늘은 우리에게 낯설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조선의 남성 기생 이야기를 통해, 시대를 초월한 문화와 젠더의 경계를 들여다본다.

      남성 기생, 조선에도 있었다

      ─ 잊힌 성별의 예인, 조선 시대 문화의 또 다른 얼굴

      1. 우리가 몰랐던 조선의 또 다른 풍경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조선시대의 기생이라 하면 아름다운 한복을 입고 가야금을 타며 풍류를 즐기는 여성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우리가 미처 몰랐던 조선의 문화 속에는, 이와는 다른 모습의 예술가가 존재했다. 바로 남성 기생, 즉 무대 위에서 여성처럼 춤추고 노래하던 남성 예인들이다.

      현대에는 다소 생소할 수 있지만,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 남성 기생은 실존했다. 그들은 궁중의 연회나 의례에서 활약했으며, 때로는 권력자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조선은 유교 국가였지만, 그 안에는 오히려 유연한 문화적 장치가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2. 남성 기생의 시작, 무동과 악공

      조선의 남성 기생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기생’과는 다소 다르다. '기생'이라는 용어 자체는 원래 남녀를 포괄하는 예인을 지칭하는 의미였으며, 초기에는 남성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무동(舞童)’**이다.

      무동은 어린 남자아이들이 여성의 복장을 입고 춤을 추며 공연을 하는 형태로, 주로 궁중 의례와 잔치에서 등장했다. 무동은 단순한 공연자가 아니라, 국가 의례의 일부를 구성하는 중요 인물이었다. 이들은 조기 선발되어 궁중의 장악원에서 혹독한 예술 교육을 받았고, 예의범절과 악기, 노래, 춤, 시문 등 다양한 교양을 익혔다.

      이러한 무동은 단순히 춤추는 소년이 아닌, 당시 왕과 귀족들에게 문화를 전하는 매개자였다.

      3. 유교 사회와 남성 기생의 공존

      조선은 유교를 바탕으로 한 엄격한 가부장 사회였다. 여성이 공적 영역에 등장하는 것은 금기로 여겨졌기 때문에, 초기에는 오히려 남성이 여성 역할을 수행하는 문화가 더 흔했다. 이는 단순히 성 역할을 대체하는 차원을 넘어, 예술적 표현 방식의 일환이었다.

      예컨대, 연희를 담당하는 자리에 여성의 출입이 어렵거나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는 경우, 남성 예인들이 여성복을 입고 등장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문화적 대응이었다. 이는 단순한 여장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공적인 공간에서의 예술 소비 방식이었다.

      4. 남창(男娼)과 정치의 그림자

      기록을 더듬다 보면, ‘남창(男娼)’이라는 용어도 등장한다. 이는 단순한 예술인을 넘어, 일부 권력층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역할까지 확장되었음을 암시한다. 특히 조선 후기 몇몇 왕이나 고위 관료들이 특정 남성 기생을 총애했다는 기록이 존재하며, 이들은 단순한 예인이 아니라 정치적, 사적 영향력을 지닌 존재였다.

      이처럼 남성 기생은 때로는 궁중의 연회와 예술, 때로는 정치와 성, 그리고 사회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층적 존재였다. 하지만 성리학 질서가 강해질수록 이러한 남성 기생은 점점 ‘음란하다’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점차 역사 속에서 지워져갔다.

      5. 왜 남성 기생은 사라졌는가?

      남성 기생의 흔적은 조선 후기부터 빠르게 사라진다. 그 이유는 복합적이다.

      ① 성리학 강화와 도덕 규범의 변화

      17세기 이후 조선은 명분과 도덕을 중시하는 성리학 사회로 더욱 경직되었다. 남성 기생은 점점 비정상적인 존재, 부도덕한 성적 상징으로 인식되었고, 이로 인해 공식적인 기록이나 행사는 줄어들었다.

      ② 여성 기생의 등장과 인기

      반면, 여성 기생은 점차 교양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특히 황진이, 이매창 같은 시조 작가들이 등장하면서, 기생은 단순한 연예인이 아닌 문학인, 예술인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여성 기생 중심의 문화가 확산되면서 남성 기생은 설 자리를 잃었다.

      ③ 기록의 왜곡과 삭제

      남성 기생과 관련된 역사 기록은 조선 후기부터 의도적으로 삭제되거나 변형되었다. 도덕적 시선으로 ‘기록해서는 안 되는 역사’로 간주된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대부분의 기생이 ‘여성’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남성 기생에 대한 인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6. 남성 기생의 문화적 유산과 예술성

      남성 기생은 단지 흥밋거리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악기 연주, 춤, 노래, 시문, 연극 등 다방면에 능한 전문 예술가였다. 장악원이나 교방(敎坊) 같은 국립 예술 교육 기관에서는 이러한 남성 예인을 전문적으로 양성했고, 국가 주요 행사에서는 늘 그들이 앞장섰다.

      이들은 조선 전통예술의 정수를 계승·발전시킨 존재였다. 단지 성별로 인해 역사에서 사라졌을 뿐, 그들의 기량은 결코 여성 기생에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여성의 공적 활동이 제한되었던 만큼, 남성 기생은 더 폭넓은 활동 영역을 보장받았다는 점에서 문화 전파자로서의 역할은 결코 작지 않았다.

      7. 현대의 시선으로 다시 읽는 남성 기생

      오늘날 K-POP 아이돌 그룹의 무대를 떠올려보자. 섬세한 안무, 감정이 실린 노래, 그리고 여성성과 남성성을 넘나드는 아름다움의 표현까지. 이는 조선시대 남성 기생의 예술성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즉, 조선의 남성 기생은 **현대적 감각으로 보면 오히려 ‘시대의 앞선 존재’**일 수 있다. 그들은 젠더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음악과 예술로 사람들의 감정을 이끌어냈다. 오늘날 문화예술이 다양성과 포용을 중시하는 시대에, 우리는 그들을 ‘과거의 오류’가 아닌 ‘시대의 선구자’로 바라볼 수 있다.

      8. 잊힌 존재를 복원하는 작업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고, 기억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남성 기생은 분명히 존재했던 인물이지만, 수백 년 동안 우리의 인식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을 다시 기억해야 할 때다.

      그들의 예술, 그들의 문화, 그리고 그들의 삶은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한국 문화사의 중요한 일부다. 지금이야말로 그들의 자취를 복원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미의식과 다양성, 포용의 가치를 되새길 때다.

      정리하며

      남성 기생은 조선이라는 유교 국가의 틀 안에서도 예술과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유연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다.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고, 시를 읊던 그들은 단지 공연자가 아니라, 문화와 시대를 이끈 선구자였다.

      역사의 그늘 속에서 잊혀졌지만, 그들이 남긴 흔적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다. 우리는 이제 그들을 조선의 이단아로가 아닌, 조선의 또 다른 얼굴로서 재조명할 준비를 해야 한다.

      기생의 시작은 원래 남성?

      “기생”이라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단아하게 가야금을 타거나 시조를 읊는 여성 예인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생 제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시작은 남성이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사적 트리비아가 아니라, 우리가 ‘전통’이라고 여겼던 이미지가 얼마나 후대에 만들어진 것인지, 그리고 그 이면에 어떤 사회적 변화와 젠더 인식의 흐름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기생 제도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기생은 단순한 ‘예능인’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조선에서 기생은 국가와 권력에 의해 조직되고 통제된 예술 전문가 집단이었다. 오늘날의 공무원형 예술가, 또는 궁중 예술가에 가까운 존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제도의 뿌리는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고려 시대의 ‘여악(女樂)’,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의 화랑도와 원화 제도, 혹은 중국 당나라의 악인 체계 등 다양한 요소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이 제도의 ‘초기’에는 남성 예인들의 비중이 훨씬 컸다는 점이다. 기록에 따르면 국가 의례나 제례, 왕실 잔치 등 공적 행사에서는 대부분 남성이 예인 역할을 수행했다. 여성은 공적 공간에 등장하는 것이 꺼려졌던 유교적 가치관 속에서, 오히려 남성이 여성 역할까지 겸하며 무대를 책임졌던 것이다.

      조선 시대의 ‘무동’, 여성 역할을 한 소년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무동(舞童)’이다. 무동은 궁중이나 고위 관청의 연회에서 춤을 추던 소년 무용수를 일컫는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장악원(궁중 음악기관)에서 혹독한 예능 훈련을 받았으며, 종종 여성 복장을 하고 여성의 춤사위를 모방하는 형태로 무대에 올랐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교 사회에서는 여성의 외출이나 공공무대 노출이 금기였기 때문에, 공식 연회에서는 여성보다 남성이 ‘더 안전한 존재’로 여겨졌던 것이다. 따라서 어린 소년들이 여성의 역할을 대신 수행하게 된 것은, 당시 사회의 문화적 대응 방식이자 제도적 선택이었다.

      또한 무동은 단지 춤만 추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궁중 예술을 대표하는 얼굴이자, 국가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예인이었다. 엄격한 선발 기준과 고도의 훈련, 정제된 예법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단순한 오락인이나 여흥의 존재로 보기엔 부족하다. 이들은 전문성과 상징성을 동시에 갖춘 존재였던 셈이다.

      기생의 초기 개념은 남녀 불문한 ‘예인(藝人)’

      초기의 기생은 성별보다는 ‘기예(技藝)’에 중점을 둔 개념이었다. ‘기생’이라는 단어 자체도 **‘기(妓)’는 예능, ‘생(生)’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단순히 여성만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었다.

      실제로 고려 시대나 조선 초기에 등장한 기생 대장은 남성 악사, 무동, 가객도 포함한 예인 전체의 명부였다. 기예가 뛰어난 이라면 성별과 무관하게 선발되었고, 궁중에서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점차 시대가 흐르고, 여성 기생의 ‘상품성’이 강화되면서, 기생의 의미는 여성에게 집중되기 시작한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기생’은 점차 ‘여성 예인’을 전제로 인식되었고, 남성 기생은 역사 속으로 조용히 퇴장하게 된다.

      여성 기생이 대체하기 전, 남성 예인이 했던 역할들

      조선 초기에는 궁중의 제례, 연희, 연회, 외국 사신 접대 등 수많은 공식 행사에서 남성 예인들이 주요 역할을 담당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활동이 있었다:

      • 궁중 정재(정식 궁중 무용) 공연
      • 왕의 생일과 혼례, 연등회, 팔관회 등 국가 행사
      • 외국 사절단 접대 연주 및 무용 공연
      • 양반가 문인들과 시조 교류

      이 모든 자리에 남성 예인이 참여했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여성적인 몸짓을 표현하거나, 섬세한 음악과 시를 연주하며 궁중 예술의 고급스러움과 권위를 표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의 남성 기생은 단순한 ‘여장남자’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다. 조선 시대의 남성 기생 또는 무동은 단순히 ‘여장을 한 소년’이 아니다. 이들은 국가에 의해 길러지고 훈련된, 고도로 전문화된 예술인이었다. 그들의 존재는 단지 성별을 넘나드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위한 체계적인 육성과 문화적 역할 수행의 결과였다.

      오히려 오늘날의 ‘성소수자’ 개념이나 ‘여장 남자’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것은 현대적인 오해일 수 있다. 조선 시대의 문화적 맥락 안에서, 남성 기생은 유교 질서와 공공성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한 공적 예술가이자 문화 사절이었던 것이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중심이 이동한 결정적 전환기

      그렇다면 언제부터 기생은 '여성 중심'의 문화로 바뀌었을까? 대략 조선 중기 이후부터 여성 기생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성종~중종 시기에는 여성의 기예와 문학적 능력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며, 점차 여성 기생이 무대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특히 황진이, 이매창, 홍랑 등 뛰어난 여성 기생들이 문학사에 이름을 남기면서, 기생은 더 이상 단지 ‘공연자’가 아닌, 지식인·시인·문화인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반면, 남성 기생은 점점 시대 흐름에서 밀려나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기록조차 사라지게 된다.

      마무리하며

      ‘기생의 시작은 남성이었다’는 사실은, 단지 역사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익숙하게 여겨온 문화적 틀이 사실은 얼마나 시대의 선택과 권력의 관점에 따라 만들어진 것인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기생이라는 말에는 ‘예술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시작에는, 잊혀진 남성 예인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조선의 무대 위, 남성 기생이 춤추던 시대가 있었다

      왜 남성 기생은 사라졌을까?

      ─ 성별, 예술, 시대가 교차했던 경계의 역사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 존재했던 **남성 기생(남창, 무동, 남예인)**은 분명 한 시대의 예술과 문화의 중요한 축이었다. 궁중의 의례에서 춤을 추고, 고관대작 앞에서 시를 읊고, 음악과 노래로 왕의 잔치를 빛냈던 이들은 단지 무용수가 아니라 조선 예술사에서 정식으로 인정을 받았던 존재였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우리는 이들의 흔적조차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을까? 단지 "유행이 변해서" 혹은 "여성이 더 잘 어울려서"라는 단편적인 이유로 보기에는 너무나 아쉬운 일이다. 그 이면에는 복합적인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변화가 겹겹이 작용했다.

      1 유교적 성리학 질서의 강화

      조선은 고려에 비해 훨씬 더 유교적이고 엄격한 사회 질서를 구축한 국가였다. 초기에는 상대적으로 융통성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성리학은 성별, 계층, 직업, 인간관계 전반에 대해 고정된 규범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강화된 성리학 질서는 다음과 같은 변화를 이끌었다:

      • 남성과 여성의 역할 구분이 더 명확해졌다.
        → 남자가 여성처럼 화장하거나 춤을 추는 행위는 점차 "부도덕한 것", "기이한 것"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 남성과 남성 간의 친밀한 관계가 금기시되었다.
        → 조선 초기에는 왕과 남창 간의 친밀한 교류도 허용되었지만, 후기에는 그것이 **'음란하다', '패륜이다'**라는 도덕적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이처럼, 남성이 여성처럼 행동하는 것 자체를 ‘사회적 일탈’로 바라보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남성 기생은 자연스레 소외되었다.

      2 여성 기생의 대두와 상품화

      조선 후기부터 여성 기생의 인기가 급격히 상승했다. 그 배경에는 단순한 예술성 외에도 문화의 상업화, 여성 기생의 사회적 기능 확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여성 기생이 중심이 된 배경

      • 황진이, 이매창, 홍랑 등 명기(名妓)의 등장은 여성 기생에 대한 미화와 이상화를 낳았다.
      • 풍류 문화의 민간 확산으로 기생은 더 이상 궁중 예인에 머물지 않고, **양반, 상인, 중인 모두가 접하는 '문화 콘텐츠'**가 되었다.
      • 문학, 예술, 로맨스, 가무 등 종합 예술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여성 기생'이 브랜드화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여성 기생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남성 기생은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갔다.

      3 남성 기생에 대한 도덕적 낙인

      남성 기생은 조선 후기부터 부정적 이미지를 뒤집어쓰게 된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사회적 인식이 퍼졌기 때문이다:

      • “남자가 여자처럼 행동하면 음란하다.”
      • “왕과 남창 사이의 애정은 정치적 부패와 연결된다.”
      • “남자가 화장을 하고 여성 복장을 입는 것은 천박하고 추잡하다.”

      이는 단순한 편견이 아닌, 성리학 사회에서 ‘기이한 성행위’에 대한 억압과 혐오로 연결되었으며, 국가의 공식 기록과 문화 시스템에서 남성 기생을 제거하는 명분이 되었다.

      4 기록의 삭제, 왜곡, 침묵

      우리는 역사를 통해 과거를 배우지만, 모든 역사가 진실을 말하지는 않는다.
      조선 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그리고 해방 이후까지 남성 기생에 대한 공식 기록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단지 그들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가 의도적으로 지워졌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기록 왜곡 양상:

      • 문헌에서 ‘무동’이라는 단어 자체를 점차 축소하거나, 여성화된 ‘기녀’ 중심으로 재편.
      • 성적인 함의가 있는 남성 기생 관련 기록은 ‘불온서적’, ‘비사(秘史)’로 분류.
      • 조선 후기 성윤리 강화 속에서 공적인 기록에 남기길 꺼림.

      결과적으로 남성 기생은 기록되지 않은 자, 무대 밖으로 밀려난 자가 되었다.

      5 일제강점기 이후의 왜곡된 이미지 정착

      근현대에 들어서며 기생은 더욱 성적 이미지에 집중된 여성 직업군으로 인식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식 유곽 문화가 도입되었고, ‘권번’이라는 예술조합 시스템을 통해 기생은 상품화되었다.

      이 시기 기생 = 여성, 유흥, 접대라는 이미지가 확고히 자리잡았고, 남성 기생은 아예 존재 자체가 모호한 과거의 일화로 치부되었다.

      6 현대적 감각으로 본 역사적 ‘지워짐’

      오늘날 우리는 젠더에 대해 비교적 자유롭게 논의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K-POP 아이돌이 섬세한 안무를 추고, 남성이 화장과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것도 이제는 자연스럽다.

      하지만 조선시대 남성 기생의 이야기는 오히려 현대보다 앞선 미적 표현과 젠더 다양성의 사례였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시대의 도덕, 정치, 권력 질서 속에서 지워지고 잊혔다.

      지금 우리가 남성 기생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이유는 단지 과거를 소비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에 이미 존재했던 다양성, 그리고 그것이 억압되거나 삭제되었던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정리하며

      남성 기생은 단순히 “사라진 직업군”이 아니라, 젠더와 예술, 권력과 도덕이 충돌했던 복합적 현상의 희생자였다.
      그들이 사라진 이유는 시대의 흐름이었고, 사회의 판단이었고, 권력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존재를 다시 조명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어떤 문화와 가치를 회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던져준다.

      대표적인 남성 기생의 흔적들

      ─ 무대 위의 그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우리가 오늘날 기억하는 조선의 기생은 대부분 여성이다. 황진이, 이매창, 매란방 같은 이름은 문학과 예술 속에서 강렬하게 살아 숨쉬지만, 남성 기생의 이름은 대체 어디에 남아 있는가?

      그들은 단순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제도·기록·그림·문학 속에 암시적·직간접적으로 남아 있다.
      지금부터 그 실체를 추적해보자.

      1 무동(舞童) – 여성보다 먼저 무대를 점령한 소년들

      조선시대 공식 문헌과 의례서, 악서(樂書)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남성 기생의 흔적은 단연 **‘무동’**이다.
      무동은 어린 남자아이들이 여성복을 입고 춤을 추는 직업군으로, 주로 다음과 같은 자리에서 활동했다:

      • 궁중 정재(정식 의례무용): 대례, 진연(進宴), 왕실 잔치, 외국 사신 접대 시 등장
      • 국가 의례: 동지제, 팔관회, 연등회 등에서 종묘악, 제례악과 함께 무용 수행
      • 장악원 소속 연행자: 장악원은 국가에서 음악과 무용을 맡은 기관으로, 무동은 이곳에서 교육받고 실무에 배치됨

      이들은 단순한 ‘어린 춤꾼’이 아니라, **국가의 권위와 품격을 대표하는 ‘국가 예인’**이었다.
      특히 정재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무애무(無碍舞)> 등은 여성복장 남성 무동이 주연을 맡는 대표적인 무용이었다.

      2 궁중악사와 악공(樂工) – 남성 예인의 실무자들

      기생은 음악·무용·문학 전반을 아우르는 예인이었고, 그 중심에는 **남성 악사(악공)**가 존재했다.

      • 악공은 기생의 상위 또는 동등한 개념으로, 종종 남성 기생이 그 역할을 수행했다.
      • 궁중 연회에서 가야금, 해금, 대금, 장고 등을 연주하거나 무용을 이끌던 남성 악공은 사실상 남성 기생의 역할을 수행했다.
      • 장악서, 장악원 문서에 따르면 악공 중 일부는 **시와 노래, 무용까지 겸했던 ‘다기능 예인’**이었고, 이들이 남성 기생으로 활동했음을 암시한다.

      예컨대 18세기 중엽 **정조 시대 ‘장악원사서(掌樂院事書)’**에는 악공 중 무대를 병행하는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들은 오늘날로 치면 작곡가 겸 가수 겸 무용수로 볼 수 있으며, 대부분 남성이었다.

      3 의례기록과 악서(樂書) 속 남성 기생의 모습

      정조, 영조 시기 궁중 의례를 기록한 도서에는 남성 예인의 활동 모습이 상당히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 예: 《진찬의궤(進饌儀軌)》, 《진연의궤(進宴儀軌)》 등에는 남성 예인이 복식을 입고 춤을 추는 장면 묘사
      • ‘초립을 쓴 남동(童)’들이 춤을 추며 등장하거나, ‘가무 병용자’로 호명됨
      • 여성 예인이 무대를 장악하기 전, 대부분의 공연은 무동 또는 남성 기예자 중심으로 구성되었음

      즉, 남성 기생은 조선의 ‘기록 예술’ 안에 실질적으로 존재했으며, 다만 ‘기생’이라는 명칭보다는 ‘무동’, ‘악공’, ‘예인’ 등으로 호칭되었을 뿐이다.

      4 왕과 귀족들의 애정 대상, 남창의 그림자

      정사(正史)에는 명확히 언급되지 않지만, 실록이나 비사(秘史), 야담류에는 왕 또는 귀족이 남창(男娼) 혹은 미소년 예인을 총애했다는 기록이 암시적으로 등장한다.

      예시:

      • 조선 후기, 특정 국왕이 정기적으로 ‘남자 예인’을 접견했다는 기록이 실록 안에 암호처럼 기록됨
      • 문집이나 사설에서 “꽃다운 예인 중 그대는 달보다 어여쁘도다”라며 성별을 명확히 밝히지 않은 시가 다수 존재

      이는 단순히 동성애와 관련된 담론이 아니라, 남성 기생의 문화적 입지와 성정치적 역할이 그만큼 민감하고 중요한 사안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5 조선 후기에 사라진 남성 기생의 ‘왜곡된 잔재’

      남성 기생이 사라진 뒤에도, 몇 가지 상징과 문화 형태로 남성 기생의 잔재가 이어졌다.

      • 남성 예능인들이 여성복을 입고 공연을 하는 전통이 명맥을 유지
        • 일부 지역 농악대, 탈춤, 줄타기 등에서 **‘여장을 한 남성 공연자’**가 등장
        • 이는 실질적으로 남성 기생 문화의 변형된 생존 방식으로 해석 가능
      • 조선 후기 탈춤극 ‘양반전’, ‘기생전’에서 남성 배우가 여성 기생을 연기
        • 이는 기생 문화가 사회 풍자와 결합되며, 남성이 여성 기생 역할을 흉내 내는 문화로 재탄생한 형태

      6 회화와 문학 속 남성 기생의 흔적

      신윤복, 김홍도 등 조선 후기 풍속화가들의 그림 속에서도 간간히 남성 기생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일부 그림에는 복식상 남성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여성처럼 춤을 추거나, 가야금을 켜고 있는 장면 묘사
      • 시문집에는 **‘봄빛은 얼굴에 흐르고/ 붉은 옷자락 아래 춤이 흐른다’**는 식의 묘사들이 있지만, 성별은 명확히 언급되지 않아 남성 기생의 가능성도 있음

      마무리하며

      남성 기생은 기록되지 않은 자, 혹은 기록 방식이 바뀐 자다.
      그들의 이름은 실록에 없고, 교과서에도 없다. 하지만 조선의 문화, 예술, 궁중 연회, 그리고 무용과 음악의 역사에는 분명히 그들의 흔적이 선명히 새겨져 있다.

      • 무동의 발끝에서
      • 악공의 현 위에서
      • 왕의 연회 무대 위에서
      • 비밀스러운 시구와 회화 속에서

      그들은 단지 무대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시대가 그들을 지워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들을 다시 기억할 수 있다.
      문화의 이면에 숨겨진 또 다른 주인공으로서, 잊힌 아름다움으로서, 우리의 이야기로 다시 불러내야 한다.

      현대 문화 속 남성 기생의 재해석

      ─ 시대를 넘어 돌아온 ‘그들’, 젠더와 예술의 새로운 시선

      과거 조선 시대의 남성 기생은 무대 위에서 여성처럼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예술로서 감동을 전했던 존재였다. 그들은 궁중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문학과 예술의 정수(精髓)를 퍼뜨리는 **젠더 유동적 예인(藝人)**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에서 지워졌지만, 오늘날 우리는 의외의 장소에서 그들의 흔적을 다시 만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현대 대중문화, K-POP, 사극, 퀴어문화, 그리고 전통예술 복원 흐름 속이다. 지금 우리가 소비하는 콘텐츠 속에는 조선의 남성 기생이 남긴 감각과 유산이 은연 중에 살아 숨쉬고 있다.

      1. K-POP 아이돌: 새로운 시대의 남성 기생?

      K-POP의 전 세계적 성공은 단순히 음악을 넘어, 무대 예술의 미학을 전 세계에 알린 사례다. 그런데 그 중심에는 춤추고 노래하며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남성들, 다시 말해 현대적 ‘남성 예인’들이 있다.

      K-POP 남성 아이돌의 특징:

      • 화려한 의상, 세심한 메이크업, 유려한 춤 선
      • 감성적 가사와 몸짓으로 관객과 정서적 교감
      • 무대 위에서 ‘강인함’보다 ‘아름다움’과 ‘표현력’에 집중
      • 성별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퍼포먼스 (예: 남자가 꽃장식 한복 착용, 여리한 창법 사용)

      이는 조선시대 남성 기생의 모습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무대를 수놓던 무동이나 남예인들도, K-POP 아이돌처럼 예술성과 미를 동시에 구현하려 했다.

      오늘날 방탄소년단, 샤이니, 세븐틴 등은 전통복식이나 민속 소재를 차용한 무대에서 “조선의 남성 예인”의 정서를 재현하고 확장하고 있는 셈이다.

      2. 사극과 영화 속 부활한 ‘남성 기생’ 캐릭터

      최근 사극이나 창작 영화에서도 조선의 남성 기생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역사적 고증이 아니라, 젠더와 예술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관점을 담고 있다.

      예시 콘텐츠:

      • 드라마 《왕이 된 남자》: 여성처럼 아름다운 궁중 예인들이 남성임을 암시하는 장면 삽입
      • 웹드라마, 사극웹툰 등에서 등장하는 ‘꽃같은 남자 예인’ 캐릭터: 조선시대 젠더 코드의 해체와 미화된 재해석
      • 뮤지컬, 국악 창극 등에서 남성 배우가 여성 기생 역할을 연기

      이러한 콘텐츠는 단순한 파격을 넘어서 “기생은 반드시 여성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 속에서 과거 남성 기생은 단지 ‘특이한 존재’가 아니라, 예술적 표현의 또 다른 방식으로 수용된다.

      3. 젠더 다양성과 퀴어 문화 속의 남성 기생 상징

      현대 사회에서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담론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남성 기생은 때로는 ‘젠더 경계의 해체자’, 또는 **‘전근대적 퀴어 상징’**으로 소환된다.

      • 남성 기생은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연기하며, 고정된 성 역할을 넘어선 존재였다.
      • 이는 오늘날 퀴어 문화나 젠더 플루이드(gender-fluid) 아이덴티티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 일부 퀴어 아티스트는 남성 기생의 이미지를 차용해 자신만의 미학을 창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남자 댄서가 한복을 입고 고전무용을 추는 현대 공연이 종종 SNS에서 화제가 된다.
      그 속에는 과거 ‘남창’이라 불렸던 이들의 아름다움, 상징성, 예술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4. 전통예술 복원 흐름 속 재조명되는 남성 예인

      국악, 정재(정식 궁중 무용), 판소리 등 전통 예술의 복원과 전승 움직임이 활발해지면서, 남성 기예자(남성 기생)의 존재도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주요 움직임:

      • 궁중무용에서 남무(男舞) 복원 시도: 여성이 맡았던 역할을 다시 남성이 연기하는 시도 등장
      • 창작 국악 무대에서 ‘남성 기생’ 테마 공연 증가
      • 전통 복식을 입은 남성 퍼포먼스 그룹 활동 (예: 남자 한복댄스팀)

      이는 과거 무대에서 사라졌던 남성 기예자들이 다시 예술 세계로 돌아오는 신호탄이다.
      단지 ‘이색적’이라는 이유가 아니라, **그들 역시 문화사 속 중요한 예술가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복권(復權)**이다.

      5. 학계·대중문화의 융합: ‘남성 기생’을 다시 읽는 움직임

      학문적 영역에서도 조선의 남성 기생에 대한 재조명이 진행 중이다.

      • 역사학·문화인류학에서는 남성 기생이 성문화, 권력, 예술을 매개한 중층적 존재였음을 강조
      • 젠더연구에서는 **기생의 젠더 정체성, 성 역할 수행성(퍼포머티비티)**를 조명
      • 일부 예술가들은 ‘남성 기생’을 주제로 한 전시회, 무용극, 영상 예술을 발표하고 있음

      이는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전통의 다층성에 대한 현대적 탐색이다.
      남성 기생은 이제 더 이상 ‘역사 속 이색 존재’가 아닌, 지금-여기의 문화적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남성 기생은 여전히 살아 있다

      조선의 남성 기생은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졌지만, 그들의 예술성과 상징성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현대 문화 곳곳에 되살아나고 있다.

      • K-POP 무대 위에서
      • 사극 속 인물로
      • 퀴어 아티스트의 상징으로
      • 전통 예술 복원의 실험무대에서
      • 젠더와 문화의 경계를 허무는 예술적 도전 안에서

      그들은 여전히 춤추고, 노래하며, 말하고 있다.

      우리가 몰랐던 조선, 더 많은 이야기

      남성 기생의 존재는 조선이라는 사회가 단순히 ‘보수적 유교 국가’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양성과 유연성, 그리고 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이 존재했던 시대. 그 속에서 남성 기생은 분명한 사회적 위치를 가지고 활약했다.

      이제는 이 잊혀진 존재들을 다시 조명하며, 그들이 남긴 문화적 흔적과 의미를 되새겨야 할 때다. 과거의 '그들'은 단지 흥밋거리나 기이한 존재가 아닌, 그 시대 문화의 일부이자 우리가 잃어버린 정체성의 조각일지도 모른다.

      마무리하며

      남성 기생의 존재는 단지 흥미로운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문화의 뿌리 속에 존재했던 다양성과 예술성, 그리고 젠더 표현의 유연성을 증명한다. 이젠 그들을 기억하고 이야기함으로써, 더 넓은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